•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우란분재
강호선

우란분재는 『우란분경(盂蘭盆經)』, 즉 『목련경(目連經)』을 전거로 하여 선망영가(先亡靈駕)를 추천(追薦)하기 위한 불교 의식인데, 범위가 확대되어 지옥과 아귀의 삼악도에서 고통 받는 중생까지도 제도하는 법회가 되었다.

원래 우란분재는 고통 받는 영혼을 천도하는 날이자 승려들의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에 3개월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행하는 하안거를 해제하면서 승려가 신도로부터 공양을 받고 하안거에서 얻은 성과를 문답하고 법회를 여는 것이 중심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의 명복을 빌고 지옥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 의식을 겸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란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즉, 우란분재는 하안거의 수행을 통해 공덕을 쌓은 승려를 공양하여 그 도력에 힘입어 망자를 천도한다는 구도에 따라 설정된 것이다.

우란분재는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설행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유교 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취약점은 바로 효(孝)라는 지 점이었다. 한나라 때부터도 유학자들은 효의 윤리를 가지고 불교를 비판할 정도였다. 유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교도 유교 사회에 걸맞은 효를 내세워야 했고,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련 존자(目連尊者)의 이야기는 그에 적합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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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존자상
목련존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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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때 화엄승 규봉 종밀(圭峯宗密)은 『우란분경소(盂蘭盆經疏)』에서 목련이 출가하여 부모를 삼도(三途)의 고난에서 구하였다고 서술하여 중국 불교가 유교로부터 비판을 받아 왔던 출가불효설(出家不孝說)에 대응하였다. 불교 사서인 『불조통기(佛祖統紀)』를 통해서도 육조(六朝) 시대부터 이미 우란분재가 설행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란분재는 점차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면서 승려와 일반인이 함께 공양을 올렸다. 당나라에 구법 여행을 떠났던 일본 승려 원인(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당시 여러 절에서는 7월 15일에서 17일까지 우란분회가 열렸음을 기록하고 있어249)원인(圓仁),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신복룡 옮김, 『입당구법순례행기』, 정신세계사, 1991, 205쪽. 이때 이미 음력 7월 15일의 백중(百中)에는 우란분재(백종(百種))가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설행된 우란분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늦어도 12세기부터는 꾸준하게 우란분재가 설행되었음은 짐작할 수 있으며, 항상 7월에 설행되었음도 확인된다. 또한, 관리의 휴가 규정을 살펴보면 7월 보름을 중원(中元)이라 하였다.250)『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관리급가(官吏給暇)조.

1106년(예종 1) 7월에 예종은 장령전(長齡殿)에서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하면서 우란분재를 베풀었고, 이튿날에는 이름난 승려를 궁으로 불러 『목련경』을 강독하게 하였다. 현재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고려시대의 우란 분재 설행은 예종대부터 공민왕대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불과하다. 예종이 설행한 우란분재의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우란분재는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추천을 위한 행사로 7월에 개설하였으며, 우란분재의 소의 경전인 『목련경』도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우란분재 기사는 일국의 국왕으로서 설행한 불사가 아닌 부모의 명복을 비는 자식의 입장에서 설행한 지극히 개인적인 불교 의식이었다.

우란분재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소략하여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왕실에서 설행한 우란분재의 경우에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설행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설행 장소가 변화하였다. 예종·의종·공민왕은 모두 궁궐 내에서 우란분재를 설행하였으나 충렬왕·충선왕은 신효사(神孝寺)와 광명사(廣明寺)를 이용하였다. 예종·의종·공민왕이 설행한 우란분재나 충렬왕·충선왕이 설행한 우란분재 모두 선망부모의 추천을 목적으로 하였겠으나 충렬왕과 충선왕의 경우에는 그 대상에 원나라 황제도 포함되었다. 광명사와 신효사는 원나라 세조의 기일·대상 및 제국 대장 공주의 소상 등과 관련된 불사를 행하던 사찰로 원나라 황실을 위한 축성 도량이었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기록에는 왕실에서 설행한 우란분재밖에 없으나 고려 후기의 기록 및 조선 초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민간에서도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 우란분재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7월 15일은 여러 부처님이 해하(解夏)하는 날이다. 경수사(慶壽寺)에서 여러 망령(亡靈)들을 위하여 우란분재를 한다기에 나도 구경을 갔다. 단주(壇主)는 고려의 승려인데, 새파랗게 깎은 둥근 머리에 희고 청정한 얼굴을 하였고 총명과 지혜는 남보다 뛰어났다. 창(唱)하고 읊는 소리가 여러 사람들을 압도하였고, 경율론(經律論)에 모두 통달하고 있는 정말로 덕행(德行)이 뛰어난 승려였다. 『목련존자구모경(目連尊者求母經)』을 설(說)하는데, 승 니도속(僧尼道俗)과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모든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고 있었다.251)『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권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280∼283쪽.

이 글은 1347년(충목왕 3)경에 편찬된 몽고 및 한어 어학 교재인 『박통사(朴通事)』에 수록된 내용이다. 경수사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 있던 사찰로 우란분재는 원나라에서도 7월 15일이면 으레 설행하던 불교 행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경수사의 우란분재를 이끈 단주가 고려 승려이며 『목련경』을 강설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원나라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고려 승려가 우란분재를 주재하였다는 것은 고려에서도 우란분재가 일반적으로 설행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한편, 조선 건국 후에도 우란분재는 지속적으로 설행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우란분재에 대한 비판 기록을 통해 역설적으로 고려시대에 일상적으로 설행되었던 우란분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1401년(태종 원년) 지합주사(知陜州事) 윤목(尹穆)과 관련된 기록을 보도록 하자. 경상도 합주 몽계사(夢溪寺)의 승려가 매우 잘 갖추어서 백종법석(百種法席), 즉 우란분재를 설행하였다고 한다. 윤목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우란분재 설행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절에서 가지고 있던 곡식 300여 석을 가져다가 잡공(雜貢)의 부족분을 보충하고 나머지는 향교(鄕校)에 주었다고 한다. 태상왕인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였고 결국 윤목의 죄를 조사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1445년(세종 27)에는 승려들이 우란분재를 핑계로 도성 안에서 횡행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헌부를 힐책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에 의하면 나라의 풍속으로 7월 15일에 절에 가서 혼(魂)을 불러 제사하는 백종·시식(施食)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도성의 승도가 “거리와 골목에서 기를 세우고 쟁과 북을 치며 탁자를 설치하여 찬구(饌具)를 늘어놓으며 횡행하자 사녀(士女)와 경사(卿士)의 집에서도 행하는 자가 있었다.” 하였는데, 이것을 통하여 고려시대 우란분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한 해 중에서 가장 큰 행사로 4월 8일 연등, 7월 망일 우란분, 12월 8일 욕불 행사의 세 가지를 꼽고 있다. 그리고 성현은 7월 15일 불가(佛家)에서는 백종(百種)의 화과(花果)를 모아 놓고 우란분을 마련하는데 장안의 비구니 사찰에서 더욱 심하게 하였으며,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며 죽은 부모의 영혼을 제사 지냈고, 가끔은 승려들이 길거리에 탁자를 마련해 놓고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252)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 이렇게 조선 초기에 다수 나오는 우란분재에 대한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도 우란분재는 일반 백성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하는 불교 행사이자 민속 행사로 널리 행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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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약선사(藥仙寺) 소장 감로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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