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나한 신앙
강호선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인 말로 살적(殺賊)·응공(應供)·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여섯 신통(神通)과 여덟 해탈법(解脫法)을 모두 갖추어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준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 대상으로 존숭되었다. 이러한 나한에게 올리는 나한재는 크게 석가모니 당시의 십육 나한을 대상으로 하는 십육 나한재와 석가모니 이후의 제자인 오백 나한을 대상으로 한 오백 나한재의 두 종류가 있다.

고려시대의 나한 신앙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923년(태조 6) 태조가 양(梁)나라에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오백 나한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태조는 이 화상을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하게 했다고 하지만, 이때 이곳에서 나한재를 설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현전하는 기록에서 확인되는 나한재 개설 기사는 1051년(문종 5) 개경의 보제사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 나한재를 설행하였다는 것이다.263)『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5년 4월 임오. 『고려사』에는 다른 불교 관련 기사와 마찬가지로 나한재와 관련된 기록도 왕이 직접 사찰에 행차하여 설행한 경우만이 전하고 있어 이것만으로 고려시대 나한재 설행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현전하는 나한도의 화기(畵記)나 기타 문집 등에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하여 고려시대 나한 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나한을 공양하며 찬탄하는 법회인 나한재는 주로 궁궐 밖의 사찰에서 거행되었다. 나한재는 크게 십육 나한재와 오백 나한재로 구분되는데, 『고려사』에서 나한재와 오백 나한재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바로 십육 나한재와 오백 나한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오백 나한재의 경우에는 그 명칭을 분명히 밝혔고 십육 나한재는 나한재로만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한재는 신광사, 외제석원, 신중원, 왕륜사, 금신굴, 산호정 등 여러 사찰에서 설행하였지만 오백 나한재는 1090년(선종 10) 신혈사, 1102년(숙종 7) 신호사에서 개설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경의 보제사 나한전에서 설행하였다. 한편, 1099년(숙종 4) 보제사에서 삼백 나한재를 설행하였던 기록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264)『고려사』 권11, 세가11, 숙종 4년 9월 임자. 십육 나한재와 오백 나한재가 통상적이지만, 드물게는 삼백 나한재도 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제사에서 설행된 나한재는 대몽 항쟁기 이전에는 3월이나 4월에 설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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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삼존·십육나한도
석가삼존·십육나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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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사는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라고도 불렸는데, 919년(태조 2) 태조 왕건이 개경에 수도를 정하면서 개경에 개창한 열 개의 사찰 중 하나로 선종 사찰이었다. 1123년(인종 1) 개경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광통보제사를 방문하였는데, 그의 글에 의하면 보제사 정전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라 이름 하였으며 웅장함이 궁궐을 능가할 정도라 하였다.265)서긍, 『고려도경』 권17, 사우(祠宇). 그러나 최사위(崔士威)의 묘지명에는 최사위가 왕명으로 보제사의 금당 및 나한전을 수리하였다고 하였다. 1075년(문종 29) 작성된 최사위 묘지명은 잠시 고려를 방문한 다음 남긴 서긍의 글보다는 정확할 것이므로, 보제사에는 본당, 즉 금당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나한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긍은 보제사의 나한보전 안에는 석가·문수·보 현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곁에는 오백 나한을 늘어놓았으며, 양쪽 행랑에도 오백 나한을 그려 두었다고 묘사하였다. 나한전에 삼존불이 주존으로 봉안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치이다. 다만, 서긍이 정전에 ‘나한보전(羅漢寶殿)’이라 방(榜)이 되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보제사 나한전은 가장 특징적인 건물일 뿐만 아니라 규모나 중요도에서도 금당을 능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각 이름을 나한전이 아니라 나한보전이라 명명한 것은 그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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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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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930년대)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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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사와 함께 고려의 나한 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은 해주의 신광사(神光寺)를 꼽을 수 있다. 태조 때 윤질이 가져온 오백 나한 화상을 봉안하였다는 해주 숭산사는 바로 신광사로 추정된다. 1053년(문종 7)에는 왕이 몸소 신광사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개설하고266)『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7년 9월 신묘. 제왕(諸王)·재추(宰樞)·시신(侍臣) 들에게 향연을 베풀기도 하는 등 신광사는 국가에서 중시하는 나한 신앙의 중심 사찰이었다. 1235년경 제작된 오백나한도 역시 신광사에 봉안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윤질이 가져온 오백나한도가 봉안되어 있던 신광사가 대몽 항쟁기에 불타 없어지자 몽고의 3차 침입 즈음인 1235∼1236년 사이에 김의인(金義仁) 등이 불사를 일으켜 앞서 봉안되었던 오백나한도와 같은 불화를 또다시 모셔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해주신광사비(高麗海州神光寺碑)」에 의하면 923년(태조 6) 승려 준정(俊呈)이 중국 후량(後梁)에서 아라한의 그림을 가져오다 풍랑에 배가 파괴되어 그림 상자만이 해주 부근에 표류해 온 것을 수습하여 신광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윤질이 후량에서 오백나한도를 가져왔다는 기록과 상치되는 것인데, 신광사비의 내용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한 신앙의 중심지라는 신광사의 위상은 원 간섭기에도 지속되었다. 원나라 순제는 자신이 신광사 아라한의 영이(靈異)함으로 제위에 올랐다 생각하고 위소(危素)에게 비문을 찬하게 하였고, 신광사를 중수한 뒤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267)위소(危素), 「고려해주신광사비(高麗海州神光寺碑)」, 『위태박문속집(危太樸文續集)』 3, 장동익, 『원대 여사 자료 집록(元代麗史資料集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99∼100쪽.

나한전은 고려시대 이후 사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전각 중 하나이다. 국왕이 직접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행하였던 개경과 해주 일대의 주요 사찰뿐만 아니라 지방의 다른 사찰에서도 나한전에 나한상을 봉안하고 나한재를 설행한 기록이 전한다. 예종대 승려 관오(觀奧)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바라밀사(波羅密寺)의 공역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은 예종이 보내 준 십육 나한상을 법당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1195년(명종 25)에는 개경 인근의 의왕사(醫王寺)를 수리한 뒤 대선사(大禪師) 각공(覺公)이 미륵전에 예불을 하러 왔다가 오백 존상이 흩어져서 먼지에 파묻힌 것을 보고는 대략 27개의 탱화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랑 최광재와 뜻을 모아 손상된 탱화는 수선하고 없어진 것은 새로 그려 오백 나한을 봉안한 전각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나한 신앙은 국가에서뿐 아니라 고려 사회 전반에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나한재가 어떻게 설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 불화 중에는 오백 나한을 각각 한 폭씩 500폭에 나누어 그리거나 한 폭에 500명을 모두 그리는 등 오백나한도가 전하고 있으며, 석가 삼존과 십육 나한을 한 폭에 그린 그림도 전하고 있다. 이들 불화는 고려시대 나한 신앙이 유행하였음을 부족하나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국립 중앙 박물관, 미국의 클리블랜드 미술관, 동경 국립 박물관을 위시한 일본 곳곳에 흩어져 전해지는 오백나한도는 그림에 적힌 화기로 미루 어 보아 1235∼1236년 사이에 조성된 나한도로 혜한(惠閒) 등 여러 화사(畵師)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는 오백 나한을 각각 한 폭씩 500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인데, 대정(隊正) 김의인·도병마록사(都兵馬綠事) 이혁청(李奕聽)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발원하여 제작하였다. 화기에는 이들이 이 불화를 조성하면서 인병(隣兵), 즉 몽고가 속히 퇴치되기를 바란다는 발원문이 적혀 있다.268)편집부, 『고려시대의 불화』 해설편, 시공사, 1997, 108∼111쪽.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뒤 조성된 불화로 몽고가 속히 퇴치되어 내외가 모두 안정되기를 바라는 이 글은 긴박한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할 뿐만 아니라 나한 신앙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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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
오백나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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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설행된 나한 신앙의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목적을 밝힌 경우는 김의인 등이 발원한 나한도처럼 외적의 침입을 이겨내기 위함이거나 1151년(의종 5) 비가 내리기를 비는 것처럼 내우외환을 이겨내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한 신앙은 국가에서 설행하는 나한재를 통하여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설행되기도 하였으나 일반인에게도 신앙되었다. 김의인 등이 조성한 나한도도 목적은 국가의 안정이지만 발원자나 조성자 모두 일반 관리였으며, 개경 인근 의왕사에 나한전을 조성한 이들도 승려와 관료였다.

중국에서는 당말(唐末)에 나한 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태조 때 윤질이 오백 나한의 화상을 가지고 귀국한 것처럼 오대(五代) 시기와 그 이후 송나라에서도 나한 신앙은 지속적으로 유행하였다. 북송과 남 송대 그려진 나한도와 중국 사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한상이 이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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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
오백나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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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대의 문장가 소식(蘇軾)도 십팔 나한상을 집 안에 봉안해 두고 항상 차를 공양하였다 하며, 특히 부부의 생일에는 나한상에 공양을 하며 수명과 복을 빌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에서는 최유청(崔惟淸)이 임금의 만년장수(萬年長壽)와 왕위가 더욱 공고하기를 바라며 절에서 나한재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반적인 나한 신앙은 개인의 수명장수와 복덕을 기원하는 신앙으로 고려에서는 십육 나한상을 조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달은 자인 나한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국가적으로도 신앙하는 존재가 되어 오백 나한을 봉안하는 나한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을 조성하게 되었고, 또한 나한은 심각한 가뭄이나 외침이라는 국난의 시기에는 그러한 내우외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신앙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한 신앙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국가적 중요성은 없어지고 개인의 장수와 복덕 기원만이 남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오백 나한을 봉안한 나한전이 사찰의 중심이 되어 나한재를 설행하는 대신, 사찰 한쪽에 자그만 나한전을 세우고 개인적인 신앙 공간으로 이용하는 변화가 생기게 되었으며, 나한도나 나한상 역시 주로 십육 나한을 조성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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