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1. 조선시대 불교 정책의 시대적 추이
  • 사회적 효용과 불교 시책
김용태

연산군과 중종대에 폐불 상황에 직면한 불교는 명종대에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하였고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왕후는 숭불 정책을 단행하였다. 즉, 1550년(명종 5)에 폐지되었던 선교양종이 재건되고 도승제와 승과가 다시 실시되었다. 당시 문정 왕후가 영의정 상진(尙震)에게 내린 비망록(備忘錄)에는 “백성이 군역의 고통으로 도망쳐 승도가 되는 숫자가 날로 늘고 군액이 점차 감소하였다. 승도를 통솔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잡승의 범람을 금하기 어렵다. 『경국대전』에서 선교양종을 설치한 것은 불교를 숭상한 것이 아니며 승려가 되는 길을 막고 금지하기 위해서였다. 양종을 혁파한 이후 오히려 폐단이 더욱 심해졌으니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에 각각 선교양종을 두고 『경국대전』에 의거해 승과를 거행한다.”라고 하여,288)『명종실록』 권10, 명종 5년 12월 갑술. 법제에 의거해 양종과 승과를 재개시켜 승도의 무분별한 증가와 그 폐단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교묘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피역과 승려 증가의 폐해를 완전히 없앨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종단에서 승려의 자질과 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편이 좀 더 효율적 방안이기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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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대종
봉선사 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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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16세기 중반에도 불교는 대표적 이단이었고 그 발흥을 경계하는 유학자의 인식 또한 조선 초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언관(言官) 및 성균관 유생을 중심으로 한 반대 여론이 빗발치면서 500건에 이르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문정 왕후는 “이교(異敎)에 미혹된 것이 아니며 다만 시세에 맞추어 국가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것”임을 다시 금 내세우고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언명하면서 양종 복립을 강행하였다.289)『명종실록』 권11, 명종 6년 1월 갑진.

양종의 복립과 승과의 부활, 도승제의 재개는 기실 허응 보우(虛應普雨, 1515∼1565)로 대표되는 불교계의 건의가 수용된 것으로, 불교가 다시 공적으로 인정되고 승려의 지위를 일시적이나마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보우는 양종 복립과 함께 선종 판사와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었고 수진(守眞)이 교종 판사 및 봉선사 주지가 되었다. 또 중종의 능을 봉은사 부근으로 이건하고 봉은사를 능침사(陵寢寺)로 삼는 등 당시 보우와 불교의 위세는 앞 시기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승과는 식년인 1552년(명종 7) 임자년부터 실시되었다. 양종의 판사(判事)와 직무승이 주관하고 예조 정랑의 참관 아래 이루어졌는데, 첫 해에는 선종 21명, 교종 11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조선 전기 승과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세종대에 선교양종이 된 이후 연산군대에 폐지될 때까지 선종은 흥천사, 교종은 흥덕사에서 식년시로 3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선종은 『전등록(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의 일부를 송독하게 하였고, 교종은 『화엄경』·『십지론(十地論)』을 강설하는 것으로 시험을 치루었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 되었고 이후 중덕(中德)이 되면 국가 공인 사찰의 주지를 맡을 수 있었다. 주지는 임기가 30개월인데 선·교종 본사에서 후보자 세 명을 예조에 공문으로 추천하면 예조는 이조와 협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하였다. 중덕 다음의 승계는 선종은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였고 교종은 대덕(大德)─대사(大師)였다. 최고위 승직은 판사로서 선종 판사는 도대선사(都大禪師), 교종 판사는 도대사(都大師)였다.290)高橋亨, 앞의 책, 256∼270쪽. 이처럼 승과에 합격한 이들은 제도적 보장을 통해 주지나 승직을 맡을 수 있었고, 중앙의 관료 및 유학자와 교류할 수 있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또한 명종대에 승과에 합격한 후 교종과 선종의 판사를 일시 겸직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였고, 사명 유정 (四溟惟政, 1544∼1610)을 비롯하여 많은 승려가 승과를 통해 배출된 후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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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 휴정 진영
청허 휴정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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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정 왕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1,000건의 상소를 올리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고 비판한 끝에 왕후 사후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 양종이 혁파되었다. 양종 복립은 유학자의 불교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을 다시 환기시키기도 하였지만, 조선 중기에 불교의 존재가 재인식되는 기회였고 이후 불교계가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을 놓은 사건이었다.

다음 선조대는 성리학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심화된 결과 다수의 명현(名賢)이 등장하고 붕당(朋黨) 정치가 시작되는 등 조선이 본격적인 유교 사회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추세를 반영하여 선조는 즉위 초에 “교화를 성대하게 하면 이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언명하였다.291)『선조실록』 권5, 선조 4년 3월 정묘. 그러나 사회 내적인 변화와 유교 국가로서의 자신감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획기하는 큰 사건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바로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발발이었다. 개국 이래 초유의 위기였던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사회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국왕의 권위는 물론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도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이 일반민의 심성과 지식인의 사유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는데, 불교도 이를 계기로 이전과는 다른 양상에 놓이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폐불이라고 하는 불교 정책의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승려들이 국가의 위기에 의승군으로 활동하고 공적을 쌓음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제고되었고 불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의승군은 평양성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여하였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하였으며 그 밖에도 군량 운송, 산성 축조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 명 유정은 강화 교섭에도 참여하였고 일본과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이러한 업적은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국가와 유학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고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292)김용태, 「조선 중기 불교계의 변화와 ‘서산계(西山系)’의 대두」, 『한국사론』 4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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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유정 진영
사명 유정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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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교가 제세안민(濟世安民)과 복민우세(福民佑世)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영·정조대에 휴정과 유정 등이 밀양 표충사(表忠祠), 대둔사(大芚寺)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서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향사(享祀)되었다. 정조는 임진왜란 당시 불교의 공적에 대해 “좌선이나 불사(佛事)보다는 속세를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자비”라고 높이 평가하였다.293)휴정(休靜), 『청허당집(淸虛堂集)』, 「정종대왕어제서산대사화상당명병서(正宗大王御製西山大師畵像堂銘幷序)」(1794). 불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피역 등 사회 경제적 문제와 군주에 대한 충성 등 그동안의 윤리적 논란으로부터 큰 짐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에는 전쟁 직후의 상황을 반영하여 왕실이나 민간에서 불교 의례와 불사가 활발히 일어나는 등 숭불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광해군은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에서 인경궁(仁慶宮), 경덕궁(慶德宮), 자수궁(慈壽宮)을 조영하였는데, 이때 성지(性智)라는 승려가 풍수설에 입각해 조언하였다고 전한다. 이 역사에는 승도들이 동원되었고 도첩이 지급되었다. 이 궁궐 조영은 전후의 피폐함 속에서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것으로 비판받았고 반정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승려 노동력의 활용과 그 반대급부로서 승려 자격을 인정하는 시책이 다시 관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임진왜란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승려의 노동력과 기술을 사회에 환원하여 현실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채택된 것이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서울의 방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남한산성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선교 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었던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도총섭으로 삼아 승도를 동원하여 공사를 벌였고 도첩을 수여하였다. 축성 후에도 총섭의 통제하에 승군을 주둔시켰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유정의 제자 허백 명조(虛白明照, 1593∼1661)가 팔도의승병대장(八道義僧兵大長)으로 안주에서 의승군을 이끌었고,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때는 각성이 삼남 지방의 승병 3,000명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는 등 임진왜란 후에도 의승군의 전통이 이어졌다.294)조계종 교육원 편, 「조선 중기의 조계종」, 『조계종사 고중세편』, 조계종 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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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지도
남한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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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에는 주목할 만한 불교 시책의 변화가 없었지만 다음 현종대에 이르면 다시 사원 경제의 기반을 흔드는 조치가 취해졌다. 즉, 1663년(현종 4) 일부 사원을 제외하고 사찰의 위전(位田)과 노비를 전부 몰수하고 명례궁(明禮宮) 외 궁방(宮房)의 원당(願堂)을 혁파하도록 한 것이다. 또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 절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폐지하였는데, 이곳에 는 궁인들이 상당수 출가하여 머물렀다는 점에서 왕실 불교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효종과 현종대는 산림 출신의 성리학자들이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고 이를 반영하여 불교에 대한 강한 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백곡 처능(白谷處能, 1617∼1680)은 장문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불교에 대한 오해와 시책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승려가 시정(施政)에 대해 올린 대표적 상소이다.

이 시기까지 일부 사찰은 위전, 제전(祭田) 등 공적인 재산이 상당하였는데, 현종대 이후에는 승려의 사유 재산이나 보사(補寺) 활동, 신도의 기부가 사원 재정의 유지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불교를 강하게 억압하는 시책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숙종대에는 억불책의 시행이 완화되었고 왕실에도 불교 숭상의 기풍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711년(숙종 37)에는 승도를 시켜 새로 북한산성을 짓게 하고 11개의 진호(鎭護) 사찰을 지정하였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는 일 년에 여섯 차례 윤번(輪番)으로 입역(入役)하도록 하였는데 통솔하는 승대장으로 하여금 팔도 도총섭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후 윤번 입역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여 영조대에는 상근 승려를 두고 사찰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을 시행하였다. 이후에도 사찰의 경제적 부담이 과중하다는 지적이 있자 정조대에는 반액으로 경감되었다.295)김갑주, 「남북한산성 의승번전(義僧番錢)의 종합적 고찰」, 『불교학보』 25,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8.

영조는 불교에 대해 “유교의 도가 크게 성하니 이단이 어찌 이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는 방임적 태도를 취하였다.296)『영조실록』 권6, 영조 1년 5월 경자. 다만, 비구니의 도성 출입을 금하였고 비과세의 특권을 지닌 궁방의 원당을 혁파하라는 조치를 내리는 한편 능침 사찰의 창건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시책을 반복한 것이었다. 승도의 성내 출입 금지 조치는 순조대에도 내려졌지만 이는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반증한다. 또 영조대 이후에도 원당을 혁파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는데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은 해당 궁방에 진상을 올리는 대신 관에 납부하는 세금과 공물을 면제받고 다른 침탈을 피할 수 있었기에 각 사찰들은 지정받기 위해 앞을 다투었고 혁파 조치에도 불구하고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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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화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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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손자로 왕에 오른 정조는 조선 후기의 유례없는 호불 군주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부친 사도 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건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이듬해 능침 사찰로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는데 대부분의 재원은 각 궁방과 지방관 등의 모금으로 충당하였다.297)조계종 교육원 편, 「조선 후기의 조계종」, 앞의 책. 용주사 창건은 사도 세자 추숭(追崇)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비껴가면서 불교를 통해 효를 실천한 것이었다. 정조는 방대한 양의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길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군왕의 학문은 일반 사대부와 다르기에 유학의 도를 우선시해야 하지만 불교나 도교 또한 필요하다.”고 하는 제왕적 학문관을 피력하기도 하였다.298)김준혁, 「조선 후기 정조의 불교 인식과 정책」, 『중앙사론』 12·13, 중앙대학교 사학연구회, 1999. 정조의 친불교적 시책은 탕평 정국(蕩平政局)에서의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다. 정조는 자신을 ‘만천명월주(萬川明月主)’라고 하여 절대 왕권을 추구하였고 불교의 ‘금륜성왕(金輪聖王)’에 빗대기도 하였다. 즉위 초 혁파한 원당을 다시 부활시켜 선왕의 원찰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지원한 사실은 왕실의 권위나 재정 기반 확대와 관련이 깊다.

특히, 용주사는 창건 당시부터 전국 사찰을 관장하는 팔도오규정소(八道五糾正所)로 지정되었고 주지는 승통(僧統)으로 임명되어 남·북한산성의 총섭을 겸임하였다. 또 용주사의 승도는 1795년(정조 19)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외영에 편입되어 국왕과 혜경궁의 현륭원 참배 때 군복을 입고 호위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조대의 불교 정책이 왕권 강화라고 하는 정치적인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불교는 비록 이단이지만 혹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있다. 심산유곡에 만일 사찰과 승려가 없다면 누가 도적을 방어하겠는가.”라는 정조의 인식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299)김준혁, 「정조의 불교 인식 변화」, 『중앙사론』 16, 중앙대학교 사학연구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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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상량문
용주사 상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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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사후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19세기 세도 정치기가 시작된다. 종교사적으로 이 시기에는 천주교의 확산과 대응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천주교에 대한 경계 어린 시 각이 나타났지만 순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특히, 천주교 탄압을 고발하면서 프랑스 군대의 파견을 요청한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의 천주교 인식은 악화 일로로 치달았고 천주교는 대표적 사교(邪敎)로 지목되었다.300)조성산, 「19세기 전반 노론계 불교 인식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상사학』 13, 한국사상사학회, 1999. 이러한 시대상은 불교를 더 이상 이단으로 몰지 않는 유화적이고 방임적인 조치와 인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동학이 급성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정치의 문란과 기강 해이, 부의 집중과 양극화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찰 또한 지방 관리와 유생의 침탈을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과중한 공납뿐 아니라 사적인 상납과 향응 제공, 사찰 산림과 토지의 무단 이용 등 규모가 큰 사찰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재정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19세기 후반에는 왕실이나 중앙 정부에서 특정 사찰의 잡역을 혁파하는 조치가 다수 취해졌고 공명첩(空名帖)을 다량 발급하여 불사를 크게 지원하는 일도 많아졌다.

고종대에는 국가에서 완문(完文)을 발행하여 법주사(法住寺), 송광사(松廣寺), 금강산 지역의 사찰 등 다수의 사찰에 특혜를 주었고, 국왕과 고관들의 기부로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졌다.301)高橋亨, 앞의 책, 849∼880쪽. 나아가 1902년(광무 6)에는 사찰령 36조가 반포되어 수사찰인 원흥사(元興寺)를 세우고 국가가 직접 불교계를 통제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때 도첩제가 부활되고 사원 재산도 국가가 관리하였으며 제반 잡역의 혁파가 공식화되었다. 이는 천주교, 기독교와 일본 불교의 진출이라는 시대 조류에 대응하여 불교를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종교 정책이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19세기는 사회 내적으로나 국제 관계상 변화의 시기였고 서양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불교는 더 이상 타자나 이단이 아닌 조선의 ‘전통’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당시 불교계는 시대를 선도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역량이 없었고 구래의 종교적 기능을 묵수할 뿐 외래 종교에 대한 직접적 대응조차 하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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