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2. 숭불의 실상과 불교의 존립
  • 왕실의 숭불과 불교 후원
김용태

조선시대 불교 신앙은 크게 왕실의 숭불과 민간 신앙으로 나뉜다. 양자 모두 시기에 따라 부침을 겪기는 하였지만 왕실의 숭불은 민간 신앙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국왕은 성리학적 이념에서 일탈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불교 문제로 왕실과 유학자 관료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국왕의 성향과 사안에 따라 줄타기의 방향이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공식적 불교 정책과 별도로 왕실의 불교 후원은 장막 뒤에서 지속되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는 유교를 국교로 표명하였지만 자신은 불교를 신앙하였다. 고려 말의 고승인 태고 보우나 나옹 혜근의 비에는 이성계의 이름이 문도명(門徒名)에 기재되어 있고 즉위 후에는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자칭할 정도였다. 태조는 조상 때부터 믿어 온 신앙이라고 하여 왕실과 국가에 대한 불교의 외호를 믿었다. 죽은 신덕 왕후 강씨를 위해 서울에 흥천사를 창건하였고 개경의 연복사(演福寺) 등 큰 불사를 후원하였다. 또 고려의 전통을 이어 궁궐 안에 내불당을 존속시켰고 도성 안에서 승려가 경을 외우며 행차하는 경행(經行)을 계속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강화도에 있던 고려 대장경 경판을 서울 지천사(支天寺)로 옮긴 뒤 다시 해인사(海印寺)에 안치하였으며 재위 기간 중 10여 차례 이를 간인하는 등 대장경 보존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또 개인적으로는 창업 과정에서 쌓은 죄업을 씻고자 금으로 『법화경』 세 부를 사경하였고,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며 법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태조는 성균관을 크게 일으키는 등 공적으로는 유교를 진작시키는 정책을 취하였지만, 공자를 향사하는 석전(釋尊) 대신 문수회(文殊會)에 참가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하는 군주였다.302)高橋亨, 앞의 책, 43∼55쪽. 본격적인 억불 정책이 시작된 태종대에도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불사가 금지되었지만 수륙재와 같은 왕실 불교 행사는 계속 거행되었다. 태종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사 무학 자초의 탑비 건립을 상왕의 명을 내세워 시행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사십구재 법회를 설하고 원찰인 흥덕사의 창건을 돕는 등 부왕과 관련된 불사는 막지 않았다.

세종은 재위 초기에 강한 억불책을 시행하였지만 후반에는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1437년(세종 19)에는 흥천사 사리각을 중수하면서 금은으로 단청을 입혀 물의를 빚었고 낙성 경찬회 때 지은 글에는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고 기재되어 있다.303)『세종실록』 권95, 세종 24년 3월 을유. 또 자신이 혁파한 내불당을 궁중에 다시 세웠고 불상을 봉안할 때 불교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대비의 추천(追薦) 법회 때는 무학 자초의 제자 함허 기화(涵虛己和, 1376∼1433)가 종실을 상대로 법을 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숭불 태도로의 전환은 신료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지만 세종은 “역대 제왕이 불교를 숭신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나는 심하게 믿지는 않는다.”라거나 “이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조종을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304)『세종실록』 권94, 세종 23년 11월 계유·정축. 세종의 후궁 중 10여 명이 비구니로 출가하였고 세종의 장례 때도 전래의 규칙임을 내세워 사십구재와 소상(小祥) 전후의 불사 등 불교식 의례를 거행하여 그 유지를 이었다.

세종대의 숭불에는 승려가 된 효령 대군의 역할도 컸다. 그는 세종의 형으로서 흥천사 불사, 한강에서의 수륙재 등 왕실과 관련된 불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세조대까지 불교계와 왕실 사이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평 대군도 금불상을 주조하여 흥천사에 기부하였는데 당시 왕실 및 종실의 숭불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이는 불교가 왕실을 외호하고 국가에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고려 이래의 관념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숭불은 세조대에 정점을 이룬다. 세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호불 군주로서 젊어서부터 불교를 신앙하였고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한 후에는 더욱 불교에 의지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전을 대대적으로 번역하여 간행토록 스스로 경전을 필사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많은 불사를 벌였는데 세조가 중건하거나 토지를 기부하고 잡역을 면제해 준 대표적 사찰로는 양주 회암사(檜巖寺), 여주 신륵사(神勒寺), 합천 해인사,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院寺),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양양 낙산사(洛山寺)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서울 흥복사(興福寺)터에 원각사를 창건하고 화려한 탑을 세웠는데 1471년(성종 2) 원각사비의 비문은 김수온이 짓고 추기(追記)는 서거정, 글씨는 강희맹이 쓰는 등 당대의 최고 문사가 동원되었다. 당시 승려 학조(學祖)가 많은 왕실 불사를 주관하였고 학열(學悅)은 원찰인 상원사와 낙산사에서 산업을 경영하고 재산을 증식하여 조야의 비난이 크게 일었다. 선종 판사 수미(守眉)가 불사를 위한 대규모 모금이 민간에 피해를 끼치므로 금할 것을 주청하였을 정도로 세조대의 흥불은 개국 이래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을 일으켜 세조 사후 억불 정책의 강화를 초래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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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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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후 국왕이 공공연하게 불교를 후원하거나 불사를 벌인 일은 정 조나 고종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주로 대비나 왕비를 중심으로 불교 신앙과 후원이 이루어졌고 불교 문제가 표면에 떠올라 공론화되었을 때 국왕은 중재하는 역할만 하였다. 성종대에도 초기에는 세조비 정희 왕후의 후원을 받아 사찰 중창이 있었고, 재위 내내 선왕 및 왕실 관련 사찰은 특별히 보호되었다. 내불당은 물론 양종 사찰, 세조가 창건한 원각사, 왕실 수륙재를 거행하던 진관사와 장의사(莊義寺), 세조의 능침사인 봉선사, 원당인 용문 만덕사(萬德寺) 등에는 잡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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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약사삼존도
회암사 약사삼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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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상의 폐불 단계에 이른 연산군과 중종대에도 왕실의 숭불 행위는 계속되었다. 명종대에는 문정 왕후의 지원으로 도성 내에 비구니 절 인수사(仁壽寺)를 세웠고 태종의 어진(御眞)을 모신 장단 화장사(華藏寺)나 왕실의 원당에는 능궁(陵宮)에나 건립되는 홍문(紅門)을 세워 사류(士類)의 출입을 금하였다. 또 명종 사후 왕비의 후원으로 금강산에서 무차 대회(無遮大會)를 설하고 명복을 빌었는데 이때 대회를 주관한 승려는 청허 휴정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일반민뿐만 아니라 국왕의 권위에도 큰 타격을 주었고, 국왕과 왕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불교 신앙이 더욱 필요해졌다. 즉위 전에 임진왜란을 몸소 체험한 광해군은 무고를 받고 옥에 갇힌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를 방면하면서 불법을 물었고, 봉은사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이후 홍각등계(弘覺登階)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또 광주 청계사에서 재를 설할 때는 중사(中使)를 보내어 선수의 제자 벽암 각성에게 법을 설하게 하였다. 각성은 봉은사 선교 도총섭에 명해졌고 인조대에는 남한산성 축성을 감독하면서 팔도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보은천교원 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와 의발을 하사받았다. 각성이 호서와 호남 일대에서 많은 중수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왕실의 후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봉림 대군(후의 효종)은 즉위 전에 안주에서 각성을 만나 화엄의 종지를 물었고, 남한산성 축성에 기여한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에게도 혜감(慧鑑)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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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왕사
석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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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국왕이나 왕실의 외호에 부응하여 불교계는 국왕과 왕비, 왕세자의 천수를 비는 등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적극 기원하였다. 현종대에는 억불책이 일시 시행되었지만 두 공주를 잃은 뒤에는 원찰로 봉국사(奉國寺)를 짓고 불교식 추천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숙종 또한 초기에는 배불을 선언하였지만 태조의 사적이 있는 안변 석왕사(釋王寺)에 친필을 내리고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편액을 하사하였다. 당시 궁중에서 궁녀들이 불경을 독송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불교와 왕실의 밀착 관계는 지속되었다. 1681년(숙종 7)에는 임자도(荏子島)에 표착한 불교 서적을 서울로 옮겼는데 숙종은 『유마경(維摩經)』의 내용을 청해 들었다고 하며, 이 책들은 남한산성의 개원사(開元寺)로 옮겨 보관되다가 얼마 후 이를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대대적으로 간행하였다.305)高橋亨, 앞의 책, 688∼695쪽.

영조와 정조대는 문화의 융성이 두드러진 시대였는데 불교도 그 흐름을 같이하여 많은 사찰이 중수되었고 불상과 불화가 만들어졌다. 정조는 즉위 초에 원당의 건립을 금하고 불교가 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점차 호불 군주의 면모를 보인다. 1790년(정조 14) 사도 세자의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였는데 각 궁방과 경기 감사를 비롯한 지방관이 기부한 금액만 8만 냥이 넘을 정도의 큰 공역이었다. 여기에는 호조와 병조의 지원도 있었는데 용주사 창건 비용은 화성 축조 전체 비용의 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남한산성 도총섭이며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로서 모금에 큰 역할을 한 보경 사일(寶鏡獅馹)은 용주사 총섭으로 임명되었고, 국왕이 행차할 때 분향하며 법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정조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福田)을 지어 공양한다는 내용의 「용주사봉불기복게(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직접 지었다. 또 효를 강조하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중시하여 그 목판을 제작, 하사하기도 하였다.306)조계종 교육원 편, 「조선 후기의 조계종」,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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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패(願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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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패(願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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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은중경』 경판
『부모은중경』 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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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창건 직전인 1788년에는 선암사(仙巖寺) 등에서 후손 탄생 백일기도를 한 끝에 순조가 탄생하자 석왕사에는 기원 성취를 감사하는 글과 토지를 내렸다. 석왕사에 보관된 1792년의 교지에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지공(指空), 나옹, 무학 세 화상에게 시호를 추증하고 있어 주목된다. 정조는 “불교는 삼교(三敎) 중에 가장 뒤에 나왔으나 그 영험함이 가장 두드러진다. 유자는 이를 믿지 않으나 또한 간혹 믿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307)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5, 비(碑), 「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 불교의 효험에 대한 개인적 심회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왕실은 불사와 법회, 불전 간행을 지원하였고 왕실의 번영과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적극 후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1831년(순조 31)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왕대비의 발원으로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 120권,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등을 사경하였고 1879년(고종 16)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탄신을 경축하며 건봉사(乾鳳寺)를 원당으로 지정하고 잡역을 혁파하였다. 또 고종대에는 묘향산의 축성전(祝聖殿)이나 송광사의 성수전(聖壽殿) 등의 전각을 왕실 원당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 말까지 왕실 불교의 면모는 퇴색하지 않았고 전란이나 국가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불교 신앙은 오히려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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