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2. 숭불의 실상과 불교의 존립
  • 불교 의례와 신앙
김용태

조선 개국 후에도 망자의 왕생과 내세의 복락을 기원하고 추도하는 불교식 제의는 계속되었다. 상제례(喪祭禮)에서 불교 의례를 타파하고 유교식 제사 의례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고려 이래의 관습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유교 의례는 국가에 의해 권장되고 사대부를 중심으로 일부 행해졌지만 일반민은 물론 사대부가에서도 승려를 초빙하여 빈소(殯所)에 법석을 열거나 사십구재를 설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부녀자가 산사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제를 시행한 것이나 세종대부터 승려의 도성 출입을 제한한 것도 공공연히 행해진 불교 의례를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성리학을 표방한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승려의 윤리적 문제를 들어 비난하였지만 부모의 묘에 재궁으로 암자를 짓거나 불단을 설치하여 독경과 향불로써 부모의 명복을 비는 풍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제의의 형식을 둘러싼 논란은 조선 개국 초부터 후기까지 줄곧 이어졌다. 한 가지 예로 유교식 제례에는 고기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왕실 제례에는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불교식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고 과연 이것이 숭불 행위인지 왕실의 전통 및 관행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308)박병선, 「조선 후기 원당의 정치적 기반─관인 및 왕실의 불교 인식을 중심으로─」, 『민족 문화 논총』 2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2. 불교 제의는 유교식 상제례에 점차 밀려나게 되었지만 유교 의례가 일반에 정착된 17세기 이후에도 왕실이나 민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선 초에 행해진 대규모 불교 행사로는 연등회(燃燈會)와 수륙재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국가 행사로 시행된 연등회는 고려 말부터는 4월 초파일 불사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고려시대 연등회는 전국적인 행사였고 조선 초에도 서울과 지방에서 성대히 행해졌으나 태종대에 공식 금지된 후에는 민간에서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수륙재는 조선 전기는 물론 후기에도 대규모로 거행되었는데, 물과 땅에 퍼져 있는 혼령이나 귀신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재의이며 사후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었다.

확대보기
수륙재
수륙재
팝업창 닫기

수륙재는 조선 전기에 유일한 국가의 불교 의례였고 국상제(國喪祭)였는데, 왕실 행사인 추천재나 기신재가 연산군과 중종대에 혁파되면서 모두 수륙재로 통합되었다.309)김희준, 「조선 전기 수륙재의 설행」, 『호서사학』 30, 호서사학회, 2001. 수륙재는 민간에서도 소규모로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주로 왕실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로 설행되었다. 왕실에서는 선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거나 왕족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수륙재를 자주 베풀었으며 약사 법회를 함께 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사후 49일째에 설행되는 사십구재 또한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는데, 그 성격은 공식 제의에서 사적 행 위로 격하되었고 왕실 행사는 원당 등 관련 사찰에서 거행되었다.

조선 전기 왕실의 불교 후원과 불교 대중화 노력은 불교 서적의 언해(諺解)와 간행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7년(세종 29) 최초의 한글 불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 먼저 간행되는데, 이 책은 부처의 일생을 그린 것으로 수양 대군(후의 세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어 부처의 연보를 윤색한 일종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출간되었고 세조대에 이를 묶은 『월인석보(月印釋譜)』가 나왔다.

확대보기
『석보상절』
『석보상절』
팝업창 닫기

세조대에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이 만들어져 궁중의 정악(正樂)으로 연주되기도 하였다. 1461년(세조 7)에 설치된 간경도감에서는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능엄경』 등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는데 번역은 송나라 때 계환(戒環)의 해석, 일여(一如)의 주석을 주로 참고하였다. 또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등 불교 전적도 함께 인쇄되었다. 세조는 직접 구결 및 언해를 맡기도 하였는데 당대의 학승과 유학자 관료가 함께 번역 및 간행에 참여하였다. 앞서 『월인천강지곡』의 언해 작업은 승려인 신미(信眉), 수미는 물론 김수온, 한계희 등 고위 관료가 함께 주관하였다. 간경도감의 설치 및 불서 언해는 한글의 보급과 불교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그 역할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310)최병헌, 「『월인석보』 편찬의 불교사적 의의」, 『진단학보』 75, 진단학회, 1993. 불교사의 측면에서도 국왕이나 왕실의 후원으로 불경과 불서가 집중 간행된 것은 고려시대 이래의 불교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성종 초에 간경도감은 혁파되었지만 대비 등 왕실의 후원으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육조단경(六祖壇經)』, 『천수경(千手經)』, 『오대진언(五大眞言)』 등 불서의 언해와 간 행은 지속되었다.

확대보기
『오대진언』
『오대진언』
팝업창 닫기

16세기 이후에는 사림이 중앙과 지방 사회에서 기반을 다지고 주도권을 확고히 잡게 되면서 종법(宗法)과 부계(父系) 중심의 혈연 인식이 사회 일반에 점차 정착되었고 유교식 의례가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기존에 불교 의례가 주로 담당하던 역할을 유교식 상제례가 대체하게 된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의 기복과 내세의 추복이라는 불교의 종교적 기능은 없어지지 않았다. 특히, 전란기에는 연고 없이 죽은 자를 위해 천도재를 열고 민심에 위안을 주는 등 불교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었다.311)남희숙, 『조선 후기 불서 간행 연구─진언집(眞言集)과 불교 의식집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하지만 상제례의 영역을 유교에 빼앗긴 결과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인 불교 신앙과 의례 외에도 무속(巫俗)을 절 안에 수용하여 저변 확대를 도모하여야 했다.

조선 후기 불교 신앙의 특색으로 주목되는 것은 염불 신앙, 밀교 신앙, 무속 등과의 습합(習合)을 들 수 있다. 염불 신앙은 연원이 오래된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 원나라와 명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하였고 조선에서도 계속 성행하였다.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왕생을 기원하면 사후에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 서방 극락정토로 가게 된다는 염불 신앙은 내세의 행복을 갈망하는 일반민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깨쳐서 성불한다는 선종의 본의로 볼 때 아미타불의 타력에 의해 구제받는 염불 신앙은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낮은 단계의 교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이 바로 아미타불이며 염불이 곧 참선이라는 논리를 적극 개진하여 염불을 승려 수행 체계에까지 포섭시켰고 일반인에게도 적극 권장하였다.312)종범, 「조선 후기의 염불관」, 『중앙승가대학 논문집』 4, 중앙승가대학, 1995. 염불 신앙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19세기에 성행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특히 유명하다.313)한보광, 「조선시대의 만일염불결사」, 『불교학보』 3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5. 건봉사를 필두로 한 금강산 지역을 중심으로 열렸고,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도 열리는 등 범위가 전국 적이었다.

확대보기
능가사 수도암 칠성탱
능가사 수도암 칠성탱
팝업창 닫기

밀교(密敎)는 현교(顯敎)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8세기 무렵 중국에 유입되었지만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려 말에 다시 성행하였다. 밀교 신앙은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를 암송하여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염원하는 것이지만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도 강하다. 조선에 미친 밀교의 영향은 건축, 조각 등에도 나타나며 조선 후기의 『진언집』, 불교 의례집에 밀교적인 요소가 다수 확인된다. 조선 후기의 의식 작법에는 범자(梵字)로 된 진언을 외는 내용이 많으며, 진언 의례에는 한자와 한글로 발음을 부기해 놓아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밀교 의례의 대중화를 보여 주는데, 밀교 신앙은 처음에는 왕실과 밀착되어 있다가 점차 대중화되어 민간 신앙의 영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314)남희숙, 앞의 글.

조선 후기에는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 등 민간 신앙이 불교와 습합되었다. 이는 도교, 무속, 불교가 혼합된 형태로서 사찰 경내에 오늘날과 같이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무렵부터로 보인다. 현존하는 불화에 미타탱, 지장탱과 함께 칠성탱이 가장 많은 것은 그에 대한 요구가 매우 컸음을 반영한다.315)정병삼, 「19세기의 불교 사상과 문화」,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또 일부 승려는 관상을 보거나 부적을 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생계를 잇기도 하였다. 이는 성리학의 시대에 불교와 무속이 서로 타협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은 결과였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불교 의례와 신앙만으로는 사원의 유지와 성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원은 일종의 종교 복합 단지로서 다양하고 폭넓은 수요에 부응하였고, 이는 조선 후기에 불교가 생존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이 밖에 무속과 결합되어 기복과 병의 쾌유를 비는 마을 미륵 신앙의 사례도 많이 나타나며, 또 미륵불의 출현과 새 시대를 꿈꾸는 미륵 하생 신앙이 변혁 운동과 결부되어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일도 있었다.316)정석종, 「조선 후기 숙종 연간의 미륵 신앙과 사회 운동」,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지식산업사, 1981.

확대보기
점괘
점괘
팝업창 닫기

관음 신앙, 지장 및 시왕 신앙도 민간에서 여전히 중시되었는데 관음 신앙은 조선 초 왕실에서도 강조되었다.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翼祖)가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한 후 아들을 점지 받았다는 전승으로 인하여 관음굴에서 수차례 불사가 거행되었고 태조의 원찰 개경사(開慶寺)에는 관음상이 모셔졌다. 또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에는 세조가 상원사(上院寺)에 행차하 였을 때 관음보살이 현현하였고 이에 관음상을 조성하고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317)김영태, 「조선 초기의 불교」, 『한국사』 26, 국사편찬위원회, 1995, 271∼272쪽.

19세기에는 불교 신앙과 후원의 주체가 계층을 망라하며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왕실과 민간뿐 아니라 유학자와 고관, 명문가도 공공연하게 불사에 참여하여 후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집안은 향리(鄕里)인 예산에 있는 화암사(華巖寺)를 후원하였고 부친 김노경이 경삼 감사로 재직할 때 해인사 중건에 관여하여 33세의 김정희가 중건 상량문을 지었다. 그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봉은사 판전(板殿)의 현판 등 불교 관련 작품도 많이 남겼고 제자 신헌(申櫶)도 대둔사의 표충사보장록(表忠祠寶藏錄) 글씨, 해인사 법보전과 밀양 표충사의 현판을 쓰는 등 친불교적 성향을 보였다.318)정병삼, 「추사의 불교학」, 『간송 문화』 24,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1983. 특히, 대표적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일가의 불교 후원은 유명하여 김조순, 김좌근, 김병기 등의 이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집안은 대대로 여주 신륵사의 중건과 보수를 지원하였는데 1858년(철종 9) 왕실 내탕금으로 극락전을 중수하고 미타 삼존을 봉안할 때 김병기가 주관하여 절에 그의 공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 흥선 대원군은 아들 고종의 즉위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서울 인근에서 불사를 많이 벌였고 보광사(普光寺), 화계사(華溪寺)의 현판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확대보기
김정희가 쓴 현판
김정희가 쓴 현판
팝업창 닫기

이와 같은 왕실과 세도 가문의 대규모 지원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는데 서울·경기 지역과 금강산 일대 사찰에 집중되었다. 금강산은 원나라 때 황실이 원찰(願刹)을 지정하였을 정도로 추복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안 동 김씨 가문은 물론 헌종대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이 장안사(長安寺), 표훈사, 유점사의 불사에 시주를 하였고 이들 사찰의 공납 폐단을 시정하고 혁파해 주었다.319)정병삼, 앞의 글, 1983 ; 조계종 교육원, 「조선 후기의 조계종」, 앞의 책.

확대보기
유점사
유점사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유점사(1929)
유점사(1929)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