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3. 불교 사상의 계승과 유불 교류
  • 임제종과 선교겸수
김용태

조선 전기 불교의 교단과 계보, 사상 및 활동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이는 자료가 계승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일차적인 이유는 억불과 폐불로 실제 전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 불교계의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료는 흥천사의 주지이자 조계종 승려인 상총(尙聰)이 1398년에 태조에게 올린 상소이다. 그 내용은 당시 명리(名利)를 다투는 폐단이 여전히 남아 있어 선 수행과 강경을 하지 않는다고 개탄하면서 선과 교를 겸수할 것과 선종은 송광사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유제를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330)『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5월 기미. 그는 중국의 것을 쫓는 모화승(慕華僧)이 의례나 작법에서 전통적 의식을 계승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고 조계종 수선사(修禪社)의 작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려 말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등이 중국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그 제자들이 상총 당대에 불교계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지눌의 수선사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상총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조선 초에는 선과 교의 다양한 종파가 존재하였고, 지눌의 유풍 등 고려 이래의 전통과 원나라에서 들어온 임제종풍(臨濟宗風)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상총이 선교겸수(禪敎兼修)와 전통의 계승을 주장한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하며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다.

조선 초에는 왕사 무학 자초를 필두로 한 나옹계가 불교계 주류로 활동하였다. 자초의 제자 함허 기화는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등 경전에 대한 주석서와 함께 척불 논의에 대해 불교를 옹호하는 『현정론(顯正論)』을 남겼다. 그 밖에 당대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 세조가 우대한 신미, 수미와 그 문하의 학조와 학열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불교 전적의 언해와 간행을 주도하였고 세조대 불사 후원의 수혜자였지만 이들의 불교 사상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속세를 버린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유학자이면서 승려이기도 하였는데 화엄에 대한 주석서인 『화엄석제(華嚴釋題)』, 『대화엄법계도주(大華嚴法界圖註)』,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저술하였다. 『화엄법계도주』는 신라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법계도에 대한 주석으로 조선시대에 의상의 화엄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를 지었는데 임제종 우위의 선종 전통이 자리 잡았던 시대에 조동선의 개념을 다룬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선종에 통합된 천태종을 선종으로 보았는데 이는 천태의 수행 개념인 지관(止觀)과 이후 천태종사의 전개가 선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있는 견해이다. 한편, 그가 불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정치적 간섭과 폐해를 경계한 것은331)高橋亨, 앞의 책, 193∼214쪽. 조선시대 불교의 방향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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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영정
김시습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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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중종대에 폐불 상황을 맞이한 이후 이름 난 승려나 저술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휴정에게 연결되는 선의 계보에 몇몇 승려 이름이 등장할 뿐 불교 사상 면에서는 공백기였다. 불교사에서 비중 있게 거명될만한 승려의 출현은 명종대 양종 복립을 주도한 허응 보우에 가서였다. 보우는 선종 판사를 역임하였지만 『기신론(起信論)』과 『화엄경』 등 교학에 밝았고 사상 면에서도 선교겸수와 유불 일치를 주장하였다. 양종 혁파의 여파로 보우의 법맥과 사상은 이후 계승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조선시대의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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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영관 진영
부용 영관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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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휴 선수 진영
부휴 선수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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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 이후 조선 후기에는 수행 체계와 교육 과정이 정비되었고 문집, 주석서 등 많은 저술이 전해지고 있어 불교 사상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에는 휴정의 청허계(淸虛系), 그 동문 부휴 선수의 부휴계(浮休系)가 계파로서 성립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청허계는 사명파(四溟派)와 편양파(鞭羊派)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문파로 구성되었음에 비 해 부휴계는 비교적 단일한 계보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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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지엄 진영
벽송 지엄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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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의 제자이자 휴정과 선수의 스승인 부용 영관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영·호남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휴정의 또 다른 스승 경성 일선은 묘향산을 근거지로 평안도, 강원도 등 북방에 근거지를 두었다. 휴정은 말년에 묘향산에 주석하면서 남행하지 못하였지만 지역적으로 양자를 통합하였고, 선수는 지리산과 호남 일대를 주된 세력 기반으로 하였다. 이처럼 양대 계파의 지역적 범위는 조선 후기 불교의 중심지인 영·호남을 축으로 하여 전국에 걸쳐 있었다.

사명 유정은 청허 휴정의 적전(嫡傳)이었지만 그 문파인 사명파는 17세기 전반에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치다가 18세기에는 약화되었다. 이에 비해 휴정의 말년 제자인 편양 언기는 묘향산 등 휴정 말년의 지역 기반을 토대로 선풍을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법통설 정립을 주도하였다. 또 문도가 번성하여 편양파는 청허계를 대표하는 문파로 위상을 확고히 다졌다. 언기의 적전 제자인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 이후, 그 제자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을 필두로 한 편양파 주류는 점차 남방으로 진출하였고, 그 결과 18세기 후반에는 해남 대둔사가 청허계의 실질적인 종찰로 부상하였는데 이곳은 화엄 강학의 중심지였다.

한편, 부휴계는 초기에 선풍과 활동 면에서 청허계와 다르지 않았으나 선수의 적전 벽암 각성이 문파로서 토대를 닦은 후 그의 손제자 백암 성총 대에는 독자적 계파로서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부휴계는 1609년(광해군 1) 조계산 송광사 중수를 계기로 이곳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보조 지눌의 유풍을 강조하면서 계파의 독자성을 점차 강화시켰다.332)김용태, 앞의 글.

조선 후기 불교계는 임제종 법맥의 계승을 표방하였고 간화선풍(看話 禪風)이 중시되었다. 이와 함께 선교겸수가 강조되었으며 교학은 화엄학을 중심으로 하였다. 조선 후기 불교 사상과 수행 체계의 방향은 휴정이 제시하였지만 그 원류는 휴정의 조사 벽송 지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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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전경
대흥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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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 휴정 승탑
청허 휴정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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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은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닦은 다음 『선요(禪要)』와 『어록(語錄)』에서 지해(知解)의 병을 없애는 것”으로 가르침의 방향을 삼았다. 이는 간화선을 우위에 두고 선과 교를 겸수하는 방식이었다. 이 책들은 조선 후기 승려 교육과정의 첫 단계인 사집(四集)에 해당하는데, 『어록』은 간화선의 주창자인 송나라 대혜 종고(大慧宗杲)의 『서장(書狀)』을 가리키며 『선요』의 저자 원나라 고봉 원묘(高峰原妙)의 간화선풍은 몽산 덕이(蒙山德異)의 선풍과 함께 고려 말 이래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또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와 종밀의 저술에 지눌이 주석을 붙인 『법집별행록절요사기(法集別行錄節要私記)』는 선교겸수의 방향을 이론적으로 제시한 책이다. 지엄이나 휴정 당대에도 선과 교의 갈등과 반목은 없어지지 않았기에 선과 교를 겸수하여 양자를 포섭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휴정의 대표 저술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은 교학을 수행의 입문으로 삼되 지해에 얽매이지 말고 화두를 참구(參句)할 것을 요체로 한다. 이는 내용상 간화선 우위의 사교입선론(捨敎入禪 論)이지만 선교겸수의 대의 또한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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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념미타도량참법』
『예념미타도량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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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은 교학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선 수행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었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과 교가 각자의 방식만 주장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세태를 비판하였고, 선과 교는 법에 있어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근기에 따라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양자를 겸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청허계 내에서도 선교겸수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었다. 경전에 마음을 잃어 본지를 잃거나 문자에 집착하는 것은 비판되었지만 휴정의 제자 중 영월 청학(詠月淸學, 1570∼1654)은 간화선의 맹목성을 지적하고 단계적 수행을 강조하면서 교학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333)청학(淸學), 『영월당대사집(詠月堂大師集)』, 「초출법수차안이좌유객비지고인위차게(抄出法數遮眼而坐有客非之故因爲此偈)」. 이에 비해 부휴계는 선교겸수의 비교적 단일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보조 지눌의 유풍을 중심으로 한 선교겸수 전통의 계승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한편, 선교겸수와 함께 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염불 신앙도 수행 체계 안에 포섭되었다. 휴정 단계에서는 참선과 염불이 자신의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하여 염불을 선과 등치되는 수행 방식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함께 염불은 마음에 주안을 두는 자 성미타(自性彌陀)나 유심정토(唯心淨土) 외에도 아미타불을 염호하여 그 원력에 의해 누구나 구제되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하근기를 위한 타력 신앙도 인정되었다. 이는 수행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하는 데 매우 호소력 있는 수단이었고 조선 후기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다.

편양 언기는 휴정의 사상을 계승하여 선과 교, 염불을 각각 경절문(徑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에 배당하였고 이는 삼문 수업(三門修業)으로 정착되었다. 이후 1769년(영조 45) 진허 팔관(振虛捌關)의 『삼문직지(三門直指)』에서도 삼문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고 하는 등 조선 후기 내내 삼문을 겸수하는 전통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수행 체계는 사찰의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다. 강원과 선원, 염불당을 모두 갖춘 총림(叢林) 사원이 생겨났고 이곳에서는 삼문 수업을 겸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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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양 언기의 글씨
편양 언기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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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체계는 승려 교육 과정인 이력(履歷) 과정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력 과정은 17세기 전반에 정립된 것으로 사집(四集), 사교(四敎), 대교(大敎)의 차례로 되어 있다. 사집과는 앞서 지엄이 가르침의 요결로 삼은 『선요』, 『서장』, 『도서』, 『절요』였고, 다음 사교과는 『원각경』, 『금강경』, 『능엄경』, 『법화경』, 마지막 대교과는 『화엄경』, 『전등록』, 『선문염송』이었다. 대교과의 『전등록』은 중국 선종의 법맥과 종파를 정리한 선종 역사서로서 고려시대부터 매우 중시된 책이다. 『선문염송』은 지눌의 제자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이 찬술한 것이다. 이후 사교과에 『법화경』 대신 일심(一心)을 이문(二門)의 체계로 설명한 『기신론』이 채택되고 입문 과정인 사미과(沙彌科)가 정비되는 등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기본 체제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력 과정은 지눌 이래의 선교겸수 전통과 원나라에서 들 어온 간화선풍이 융합되어 교육 체계로 확립된 것이었다. 즉, 사집은 간화선을 중시하면서 선교겸수의 방법론적 체계를 익히는 것이었고, 사교는 당시 중시되던 경전으로 모두 선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대교는 교학의 대표격인 화엄과 선의 역사, 조사풍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력 과정의 순서는 마음(心)─이치(理)─조사풍의 습득(史)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의리(理)를 파악하고 마음(心)을 수양한 후 역사서(史)를 통해 식견을 기르는 이이(李珥)의 독서 순서와 유사한 구조이다.334)조계종 교육원, 「조선 중기의 조계종」, 앞의 책.

조선시대 불교는 성리학 중심의 시대 상황과 절연된 것이 아니었는데, 문과 시험의 초시(初試) 종장(終場)에서 사경교의(四經敎義)와 사서의심(四書疑心)을 시험 본 것을 고려하면 사교와 사집 체제의 성립이 시대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력 과정의 성립 후 해당 서적들은 집중적으로 간행·유포되었고 강원을 통해 교육·전수되었다.

한편, 17세기 전반에는 이력 및 수행 체계 정비와 함께 조선 불교의 법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고 임제종의 계승을 표방하는 태고 법통설(太古法統說)이 공인되었다. 휴정은 자신이 지엄에서 영관으로 이어지는 법계를 이었고 지엄은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적손인 대혜 종고와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적손 고봉 원묘의 선풍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전의 폐불 상황을 반영하여 지엄 이전 조선 전기의 승려 계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휴정 입적 후 제자들에 의해 조선 불교의 법통에 관한 몇 가지 설이 제기된다. 그 처음은 사명파가 주도하여 1612년(광해군 4) 허균(許筠)이 제기한 법통설로서 고려의 법안종(法眼宗)과 지눌의 전통을 강조하고 고려 말 나옹 혜근의 법맥을 휴정이 이었다고 하는 나옹 법통설(懶翁法統說)이었다.

이어 인조반정 직후인 1625년부터 약 15년간 휴정의 말년 제자 편양 언기의 주도 아래 태고 보우를 내세운 새로운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태고 법통설은 휴정의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을 재간하면서 당대의 문장가였 던 이식, 이정구 등에게 부탁한 서문과 비문에 등장하는데,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고려 말 태고 보우를 통해 전수되어 휴정에게 계승되었다는 내용이다. 태고 법통설의 정립에는 사명파도 동조하였고 부휴계 또한 이를 수용하여 공론에 의한 공식 법통설로 인정되었다. 이 법통설의 이면에는 불교가 중국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유학의 도통론(道統論) 확립과 문묘 종사 논의,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정통론이 강화된 정국 분위기 등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35)김용태, 앞의 글. 이제 불교계는 간화선 우위의 수행 기풍과 임제종 계승의 법통의 결합으로 인해 임제종을 공식적으로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태고 법통설은 조선 후기의 불교사서(佛敎史書)에서도 정론으로 인정되었다. 1764년(영조 40) 청허계 편양파인 사암 채영(獅巖采永)이 지은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에는 과거 7불, 인도와 중국의 선종 조사, 고려 말과 조선의 역대 조사 계보와 간략한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태고 법통설을 수용하여 해동 중흥조로 태고 보우를 내세우고 있다. 한편, 휴정 이후 법맥의 서술이 지나치게 청허계에 편중되었다는 이유로 부휴계 벽담 행인(碧潭幸仁)이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불조원류』 판본을 불태우는 일이 있었는데,336)김용태, 「‘부휴계(浮休系)’의 계파 인식과 보조 유풍」, 『보조사상』 25, 보조사상연구원, 2006. 이는 계파와 법맥의 이해관계가 매우 첨예하였음을 보여 준다.

편양파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의 저술로 알려진 『산사약초(山史略抄)』(1864)도 부처에서 인도, 중국, 조선의 선종 계보를 포괄한 사서로서337)김남윤, 「조선 후기의 불교 사서 『산사약초(山史略抄)』」, 『동대사학』 1, 동덕여자대학교, 1995. 태고 보우와 청허계 중심의 불교사 인식을 보여 준다. 또한,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지은 『동사열전(東師列傳)』(1894)에는 삼국시대부터 당시까지 198명의 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가 속한 대둔사의 청허계 계보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불교 사서는 당대의 불교사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법통이나 계보 등에서 이처럼 자파의 입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태고 법통설은 조선 후기 내내 견지되었는데 이는 부휴계 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후대인 1921년 부휴계 금명 보정(錦溟寶鼎, 1861∼1930)이 편록한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에는 부휴계 승려의 승전(僧傳) 위주로 수록하였는데, 시대 상황이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보조 지눌을 조계종 종조로 내세우고 있어 주목된다.338)김용태, 앞의 글, 2006.

18세기 이후 불교 사상의 특징으로는 선교겸수 풍토와 관련하여 교학, 특히 화엄학의 성행을 들 수 있다. 강학의 성행, 주석서의 편찬, 대규모 강경 법회는 당시 승려들의 문집과 비문 등에서 빈번히 확인된다. 청허계 편양파는 편양 언기의 제자 풍담 의심 이후 상봉 정원(霜峰淨源), 월저 도안(月渚道安), 환성 지안(喚惺志安), 설암 추붕(雪巖秋鵬), 설파 상언(雪坡尙彦),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인악 의첨(仁岳義沾, 1746∼1796) 등 강학의 종장이 배출되었고 교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대둔사는 편양파와 소요파를 중심으로 한 12대 종사와 강사가 배출된 화엄 강학의 중심지였다. 연담 유일과 인악 의첨은 화엄은 물론 사집, 사교 등 이력 과정의 책들에 대해 다수의 주석을 남겼는데 각각 호남과 영남의 강학 전통을 대표한다. 부휴계는 백암 성총, 무용 수연(無用秀演), 묵암 최눌(默庵最訥, 1717∼1790) 등 계보상의 적전들도 화엄 및 교학을 중시하였지만 모운 진언(暮雲震言)에서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로 이어지는 계열이 교학에 특히 뛰어났다.

이 시기에 화엄학이 주목된 이유로는 고려 이래의 화엄 중시 전통, 선종과 화엄의 사상적 친연성, 성리학에 대응되는 불교 사상으로서 화엄의 이사(理事), 심성론(心性論)에 주목하였을 가능성 등 몇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화엄 교학 성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매우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였다. 즉, 1681년(숙종 7) 전라도 임자도에 표착한 중국 배에 실려 있던 불교 전적 중 190여 권을 백암 성총이 적극 간행하고 유통시킨 것이 발단이었다. 성총이 간행한 서적 안에는 명나라의 평림엽(平林葉)이 교정·간행한 당나라 청량 징관(淸凉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抄)』와 원나라 보서(普瑞)가 지은 주석서 『회현기(會玄記)』가 포함되어 있었다. 징관의 『화엄소』 및 『연의초(演義抄)』는 『화엄경』에 대한 대표적 주석서로 중국은 물론 고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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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 조사 진영
대둔사 조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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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총이 간행한 것은 송, 원, 명의 『화엄소초』 교정 및 주석 성과를 반영한 명대의 교정본이었고, 원대의 『화엄소초』 주석의 집성작인 『회현기』가 함께 유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북송대 진수 정원(晋水淨源)의 교간본을 주로 이용하였고 그나마 『화엄소』에 대해 징관 자신이 풀어 해석한 『연의초』를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성총에 의한 간행, 유통은 화엄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전보다 한 단계 나아간 주석 및 강학을 가능케 하였다.339)김용태, 앞의 글, 2006.

조선 후기에는 화엄 법회가 매우 성행하였는데 18세기 초 환성 지안이 금산사에서 베푼 법회에 1,400명, 1754년(영조 30) 상월 새봉(霜月璽篈)이 선암사에서 연 화엄 강회에 1,000여 명이 참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시기 화엄 강학과 주석의 내용, 성리학 및 시대와의 연관성 등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 화엄의 성행은 불교 사상은 물론 당시의 시대 담론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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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의순 진영
초의 의순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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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화엄 외에도 사집의 『도서』나 『절요』, 그리고 사교의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 주요 경전 및 논소에 대한 주석서도 저술되었다. 이러한 교학 중시 경향은 선에 대한 교학적 관심으로도 이어져 『선문염송』에 대한 주석도 쓰였고 선종 5종의 역사와 선 사상의 요체를 정리한 환성 지안의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등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교학 이해의 심화를 반영하여 선의 우열에 관한 논쟁도 펼쳐졌다. 먼저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선을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삼종선으로 나누고, 이 중 조사선은 상근기, 여래선은 중근기를 위한 것으로 격외선(格外禪)에 해당된다고 보았고 의리선은 하근기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긍선은 이 삼종선을 선과 교를 두루 포섭한다고 하는 임제 삼구(三句·三玄·三要)에 각각 배치시켰고, 또 선의 5종에 대해서도 삼종선을 기준으로 나누고 임제종을 가장 우월한 것으로 하여 차등적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대해 대둔사의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서 근기의 우열에 따라 선을 세 종류로 차등화한 긍선의 주장을 비판하고, 다만 방편상으로는 사람을 기준으로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구분하며 법을 기준으로 하면 조사선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격외선, 여래선은 모든 의리를 포괄한 의리선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부휴계 우담 홍기(優潭洪基, 1822∼1881)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도 의순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긍선의 3대손인 설두 유형은 『선원소류(禪源溯流)』에서 “선론에는 교외별전인 선지(禪旨) 외에 선의 종류별로 요약 가능한 선전(禪詮)이 있다.”고 하면서 조사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종, 여래선은 『화엄경』의 교학이라고 하여 대체로 긍선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래선이라고 규정한 화엄의 사법계(四法界)를 삼종선에 대비시켜 설명하는 논리적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이어 축원 진하(竺源震河, 1861∼1926)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에서 그간의 선 논쟁이 무의미한 언구 논쟁임을 지적하고 격외선과 의리선에 우열을 두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론지었다.340)정병삼, 앞의 글, 1983과 앞의 글, 2002.

조사선과 여래선의 대비는 원래 우열을 두거나 차등적으로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었지만, 조사선을 여래선보다 우위에 두고 교학을 의리선으로 보아 한 단계 낮은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점차 생겨났다. 이전에 환성 지안 등이 이미 삼종선 구분을 제기하였는데, 여기에는 임제종 우위의 사고와 함께 선과 교에 차등을 두고 교학을 선에 비해 낮은 단계로 이해하려는 선종 중심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백파 긍선이 조선 후기의 기존 설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에 비해 초의 의순은 임제종 이전의 선종까지 염두에 두면서 선의 차등화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과 교의 본질적 차별성을 부정하는 입장이 좀 더 강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 사상계는 북학 운동과 청조 문화의 수용으로 이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불교는 임제종의 선양과 화엄 강학의 전통을 유지하였고 염불 신앙도 활성화되었다. 만일염불회는 19세기에 특히 성행하였고 이와 함께 1822년(순조 22) 백파 긍선의 선교(禪敎) 결사회 조직이나 『수선결사문(修禪結社文)』 작성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실천 운동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상계가 새 시대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불교도 새로운 사상적 모색이나 종교 운동을 보여 주지 못하고 전통의 묵수와 집대성에 만족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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