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를 내면서
정성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물 증여 행위(gift-giving behavior)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경제 활동이기 때문이다. 선물은 보이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자 감사와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다. 그뿐 아니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하는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시장 경제에서도 선물이라는 비시장(非市場)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선물이라는 용어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선물을 가리키는 영어로는 ‘present’, ‘gift’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어에는 gift라는 단어가 없었다. 서양인에게는 그런 개념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건너간 청교도(淸敎徒)가 오늘날의 미국 땅에 처음 닿았을 때 놀란 것은 인디언의 소유물에 대한 의식이 자신들과 매우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은 그것을 gift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한자 문화권에서는 이것을 보통 증여(贈與)로 번역하고 있다.

『심청전』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심학규와 그의 딸 청이 등장한다. 딸을 낳은 지 이레 만에 아내가 세상을 뜨자 심 봉사는 젖동냥하여 어린 딸을 키운다. 청이 먹고 자란 젖이 바로 증여(gift)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씨 착한 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몽운사에 바칠 공양미 300석 때문에 몸을 팔고 인당수 깊은 물에 뛰어든다. 그러나 청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용왕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연꽃이 되어 돌아온다. 또 한 번의 증여가 이루어진 셈이다. 연꽃 속에서 예쁜 처녀로 피어 나온 심청은 왕비가 되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국의 소경을 궁궐로 초대한다. 이때 심청은 아버지와 상봉하고 심 봉사는 그 자리에서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마지막 증여가 교환된다.

요컨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재화를 교환하는 형태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거래 당사자가 재화의 값을 치르고 그것을 판매·구입하는 경우이다. 이것을 시장 교환이라고 한다. 이 경우는 재화의 소유권이 그 재화를 판 사람으로부터 산 사람에게 명백하게 넘어가며, 거래가 성립되는 동시에 당사자 사이의 관계도 종료된다. 이러한 재화를 상품(commodity)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경제적 대가가 동시에 지불되지 않더라도 재화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교환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선물(present) 또는 증여(gift)라고 한다. 그런데 선물과 증여도 엄격하게 구분하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증여는 겉보기에 의무가 아니지만 답례(答禮)나 회례(回禮)가 의무나 다름없이 전제되고 있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 의미로 사용하는 선물의 개념과 다르다. 또 증여는 물건 교환의 흐름이 연속적·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선물과 차이가 있다.

한편, 우리는 보통 명품(名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유명 브랜드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브랜드의 본래 의미는 상표(商標)이다. 상표란 말 그대로 상공업자가 자기 상품을 일반 구매자에게 보이기 위하여 상품에 붙이는 표시를 말한다. 특히 그 상표를 공신력 있는 기관에 등록하였을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등록 상표라고 부른다. 이것은 명품과 그것을 위조한 모조품, 즉 진짜와 가짜를 쉽게 구별할 뿐만 아니라 명품·진품의 가치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고안해 낸 장치이다.

세상일이 대개 그렇듯이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진품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쏙 빼닮은 모조품 또는 위조품이 있다. 진품은 희소하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하는 진품일수록 더욱 비싼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값비싼 진품을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는 자만이 진품을 차지할 수 있는데,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비싼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는데도 값비싼 진품을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비록 진품이 아닌 모조품일지라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모조품의 제조·유통·소비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에서는 근대 이전에 우리나라가 주변국과 교환한 선물을 통해서 문화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국가 간 외교의 현장에서도 각종 의례(儀禮)가 빈번히 일어나고 그때마다 문서와 함께 선물이 교환되곤 하였다. 파견된 사신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 외교 행위의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문서를 교환하였고, 국가 간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자는 의지의 표현으로 물품의 증답(贈答)이 수반되었다. 외교 선물의 교환이라고 표현해야 할 이러한 외교 의례도 일종의 증여(gift)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명시적·즉각적인 반대급부가 전제되지 않고 이루어지지만, 어느 한쪽이 선물을 보내면 상대편은 의무처럼 회답, 곧 회례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외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동안에는 지속적·반복적으로 선물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외교 선물 교환은 영어의 gift에 해당하는 증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에서는 한지의 특징을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종이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수천 년 에 걸친 문자 문명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이이다.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에도 문자를 기록하였지만, 문자를 기록하는 데에는 종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었다. 중국에서 발명한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3∼4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한지는 여러 장 겹친 종이를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여 지면을 고르게 다듬는 도침법(搗砧法)으로 만들어 쉽게 썩지 않고 오래 보존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筆寫本)으로 알려진 화엄경전(華嚴經典)이 755년에 작성되어 천 년 넘게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 기술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우수한 종이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에서는 우리 옷감의 문화사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실을 뽑고 그것으로 옷감을 짰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기후가 전반적으로 따뜻해지고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자 저장을 위한 생활 용구로 토기가 제작되며, 동물의 털과 식물의 줄기·종자모 등을 이용하여 실을 만드는 기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남아 있는 줄무늬 옷, 점무늬 옷, 머리 장식 등은 복식 문화의 시작을 말해 주는 증거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옷을 입더라도 그냥 입지 않았다. 옷감에 물을 들인다든지 옷에 장식품을 달고 다니면서 멋을 내는 습성이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이 남긴 동굴 벽화를 보면, 처음에는 천연 광물에서 얻은 자연 색소를 신체에 칠하다가, 옷을 입게 된 뒤로는 그것을 의류에 착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는 아마도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로 염색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계급 사회가 되면서 염색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별하는 상징의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적 여건상 동물 염료의 공급이 쉽지 않아 식물 염료가 발달하였다.

제4장 ‘만병통치약, 인삼’에서는 오랫동안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진 인삼을 다루었다. 우리나라 인삼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삼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용되고 있었으며,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약용 식물로 귀중하게 여겨 왔다. 다만 우리나라 인삼이 국제 상품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일이다. 때로는 선물이나 증여의 형태로, 때로는 상품 매매의 형태로 국경을 넘어간 인삼은 수량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인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여전히 귀중한 약재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서양에서도 인삼에서 추출한 유효 성분을 이용하여 다양한 약품을 만들고 있다. 지금도 공항 면세점에서는 인삼과 인삼 제품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제5장 ‘우리 먹을거리의 명품, 김치’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 음식인 김치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인간이면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떤 이는 먹는 즐거움을 강조하여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고까지 말한다. 그런가 하면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도 집집마다 지역마다 맛이 다르다. ‘음식을 먹는 것은 문화를 먹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음식의 맛이 지역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우리 김치의 맛은 일찍이 19세기 이전에 국경을 넘어 지금의 부산 용두산 공원 일대에 있던 초량(草梁)의 왜관(倭館)을 통해 일본인에게 알려졌다. 이미 18세기에 김치가 중국으로 전래되어 인기가 높았음을 알려 주는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1712)도 있다. 김치를 선물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을 빗대어 ‘침채 참판(沈菜參判)’이니 ‘침채 판서(沈菜判書)’니 하는 말이 나돌 정도로 조선시대에 오면 김치가 중요한 선물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에서는 말이 인류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인간이 말을 이용하는 용도는 다양하다. 말의 운명은 바퀴의 등장과 함께 크게 바뀌었다. 근대 이후 기계가 발명된 뒤에도 엔진과 같은 기계의 힘을 나타내는 단위로 마력(馬力)을 사용하였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마차는 기차와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물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교통과 운반 수단이었다. 또한 말은 농경에도 활용되었고 오랫동안 중요한 군수 물자의 하나였다. 인간이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식용을 위해서였다. 산이나 들에서 풀과 열매를 채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생의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고 가죽은 옷감으로 활용하였다. 농경이나 운송에 가축을 이용하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인간은 짐승을 잡아먹고 난 뒤에 얻은 가죽을 생활에 이용하였다. 모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모피도 다른 물품과 마찬가지로 외교 선물과 경제적 교환의 대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의식을 거행할 때 착용하는 모피는 권력과 부(富)의 상징이었으며, 그런 만큼 아름다운 모피는 값이 비싸고 귀중한 재화로 애용되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류는 선물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어 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개인과 개인, 지역과 지역, 그리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 주고받은 선물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외교적 관계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선물과 명품을 둘러싸고 형성된 여러 형태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당시 사회의 문화적 현상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문자를 기록하는 데 필수적인 종이·붓·먹 등의 문방구, 의복의 원료로 쓰이는 각종 직물과 염료, 명약(名藥)·신약(神藥)·영약(靈藥) 등으로 일컬어지는 인삼, 요리·술·과자·김치 등의 각종 먹을거리, 말과 같은 동물과 거기에서 얻은 모피 등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물이나 증여 혹은 매매의 대상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었다. 이것을 통해 우리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6월

광주여자대학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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