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1. 동아시아 외교와 선물 교환
  • 동아시아의 외교 선물 교환
  • 선물 교환과 시장 교환, 그리고 조공 관계
정성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살펴볼 때 개인이 재화를 조달하는 방법에는 크게 선물 교환을 통해서 조달하는 방법(선물 교환)과 시장 거래를 통해서 조달하는 방법(시장 교환)이 있다. 선물 교환과 시장 교환은 모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장 교환이라고 하여 시장 경제 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만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폴라니(Karl Polanyi)가 말하는 장소로서의 시장과 수요·공급·가격 기구로서의 시장이라고 하는 두 가지 개념 중에서 장소로서의 시장이 출현한 것은 수천 년 전의 일이다.6)칼 폴라니, 박현수 옮김, 『인간의 경제』 1, 풀빛, 1983, 173∼176쪽. 원시 공동체 사회가 붕괴되면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재화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공동체 규제가 강하게 남아 있던 단계에서도 다른 공동체 성원이나 외국인과의 거래에서는 시장 교환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 간의 교류인 외교 현장에서도 재화의 교환 원리는 개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물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나타내듯이, 외교 선물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물질적 상징인 것이다. 외교 선물, 즉 예물의 교환은 외교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고자 한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외교 질서를 설명하는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인 조공이라는 개념이 포함될 경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공 관계의 유형은 크게 ‘전형적 조공 관계’, ‘준조공(準朝貢) 관계’, ‘비조공(非朝貢) 관계’로 나눌 수 있다(표 ‘조공 관계의 유형’ 참조).7)전해종, 앞의 책, 30∼32쪽. 그런데 ‘전형적’ 또는 ‘준’이라는 수식어의 개념이 애매하다. 의례 관계의 포함 여부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전형적 조공과 준조공으로 구분하자면 더욱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교역을 어디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준조공 관계의 교역과 비조공 관계의 평화적 교역이 어떻게 다른지 실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교역의 불법성·합법성을 기준으로 나눈다면 간단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조공의 틀과 연관지어 설명하게 되면 개념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외교 선물의 교환은 전형적 조공에서만 나타나는가, 아니면 준조공에서도 발생하는 것인가? 가장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외교 선물의 교환은 시장 교환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이 시장 교환과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시장을 통하지 않은 재화·서비스의 교환, 즉 비시장적 교환을 외교 선물의 교환으로 정의한다면, 외교 선물의 교환은 전형적 조공 관계와 준조공 관계에서 모두 나타난다. 예를 들면, 전형적 조공 관계로 분류되어 있는 공물(貢物)의 주고받음은 확실히 외 교 선물의 교환에 해당된다. 그뿐만 아니라 표류민의 송환 같은 준조공 관계와 관련해서도 외교 선물, 즉 예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다만, 외교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 ‘비조공 관계’에서는 외교 선물의 교환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평화적인 교역이나 왕래를 통해서도 개인적 차원에서는 선물 교환이 일어날 수 있지만, 외교 관계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한 그것을 외교 선물 교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표> 조공 관계의 유형
구분 전형적 조공 관계 준조공 관계 비조공 관계
경제적 관계 조공 청구(請求)
특수 공물(貢物), 사물(賜物)
교역(交易)
범금(犯禁)
추징(推徵)
-
의례적 관계 봉전(封典), 고애(告哀)
진하(進賀), 진위(陳慰)
사제(賜除), 부휼(賻恤)
사은(謝恩), 기타
- -
군사적 관계 청병(請兵), 원병(援兵) - -
정치적 관계 연호(年號,) 역(曆)
내정 간섭, 진주(陳奏)
경계(境界), 월경(越境)
쇄환(刷還), 표민(漂民)
-
문화적 관계 - 유학, 불교, 도교
서적, 입학, 기예(技藝)
-
기타 - - 적대 관계
평화적 교역·왕래
✽전해종, 『한중 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30∼34쪽에서 필자가 작성.

한편, 전형적 조공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 우리나라의 외교 선물의 교환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먼저 고구려는 5∼6세기에 중국과의 군사 대결을 지양하고 각국의 세력 관계 변화에 따라 다중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8)공석구, 「5∼6세기의 대외 관계」,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96, 76쪽. 백제와 중국의 관계는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6세기 전반 백제 외교의 또 하나의 특색은 일본(倭)과의 관계이다. 백제의 뛰어난 학술과 전문 지식이 일본의 국가 제도 정비와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기여하였는데,9)유원재, 「백제의 대외 관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95, 130∼131쪽, 157쪽. 이것도 광범위하게 보면 백제가 일본에 보낸 외교 선물인 것이다. 신라도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조공사·조위사·책봉사·사은사 등을 파견하여 중국과 외교 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10)신형식, 「신라의 대외 관계, 중국과의 관계」,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132쪽. 그 과정에서 외교 선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과하마(果下馬)·백금(白金)·명광개(明光鎧)·금갑(金甲)·조부(彫斧) 등이 중국에 진공(進貢)되고, 그 대가로 비단·의복·병풍·서적 등이 회사(回賜)되었다.11)신형식, 앞의 글, 271∼272쪽. 통일 뒤에는 외교 선물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고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고려는 중국의 5대 왕조(後梁·後唐·後晋·後漢·後周)는 물론이고 북방 민족인 거란(요)·여진(금)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몇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고려는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쌍방이 사신 교환을 통해 외교 관계를 지속해 나가고 있었다.12)홍승기, 「개요」, 『한국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95, 6∼8쪽. 여기에서도 외교 선물이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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