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1. 동아시아 외교와 선물 교환
  • 동아시아의 외교 선물 교환
  • 중국에 가는 외교 사절에 의한 증여
정성일

가장 전형적인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던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 선물의 교환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우선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조선이 명나라에 파견한 정규 사절은 ‘일년삼사(一年三使)’로, 신년에 가는 정조사(正朝使, 賀正使), 황제의 생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 節使, 節日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千秋使)이다. 즉, 1년에 세 번 파견되었다.13)조선 초기에는 여기에 동지사(冬至使)를 포함하여 정기 사행이 4회였다고 한다. 『통문관지(通文館志)』 제3권, 부경사행(赴京使行) 참조. 물론 여러 가지 명목으로 비정기적인 사절이 중국으로 가기도 하였다. 중국 황제에게 감사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은사(謝恩使), 특별한 요청을 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등극과 같은 경하할 일이 있을 때 가는 진하사(進賀使), 황제나 황후의 상사(喪事)를 위문하는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사신이 중국을 왕래하였다.14)『통문관지』 제3권, 부경사행. 또 조선의 국왕이나 왕비가 서거하게 되면 고부사(告訃使)가 파견되었다. 특별한 공물을 별도로 바칠 때에는 진헌사(進獻使)를 보냈다. 이 밖에도 각종 명목의 비정기 사행(使行)이 있었다. 중국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행에는 반드시 방물(方物)을 보냈다. 비정기 사행이라도 사은사와 진하사의 경우에는 방물을 보냈다.15)박원호, 앞의 글, 295∼298쪽.

사절 일행이 중국으로 가지고 가는 공물의 품목은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그렇지만 조공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로는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중국에 진헌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에 대해서는 『통문관지(通文館志)』 「방물수목(方物數目)」 등에 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지사(冬至使)의 경우 어전(御前)에는 황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흑마포 4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20장, 만화석 20장, 만화방석 20장, 잡채방석 20장, 표피 10장, 인삼 50근, 잡색마 30필을 가져가기로 되어 있다. 그 밖에 황태후·황후·황태자 등에 전달할 방물이 별도로 정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사·성절사·사은사·주청사·진주사·진하사·진향사·문안사 등이 가져갈 방물과 함께 세폐(歲幣) 목록이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다.16)『국역 통문관지(國譯通文館志)』 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128∼133쪽. 표 ‘동지사가 중국에 가져가는 외교 선물의 정액’은 1723년(경종 3) 이후 동지사행의 방물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관계와 비교하여 차이가 약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표 ‘동지사가 중국에 가져가는 외교 선물의 정액’과 같은 공식적인 진헌 물품 외에 실제로 중국에 전달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적혀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가는 사신이 가져가는 물품의 종류를 살펴보면 사람, 금은류, 동물류, 씨앗류, 신발류, 비단류, 가죽류, 옷감류, 방석류, 서화류, 종이류, 의관류, 과실류, 조류, 해물류, 함기류, 문방구류, 불구류 등 18종에 달한다.17)이현종, 「대명 관계」,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98, 345∼348쪽 ; 『서울 600년사』 한성부시대(1), 입명사절(入明使節)의 증여 http://seoul600.visitseoul.net.

<표> 동지사가 중국에 가져가는 외교 선물의 정액
품목 단위 황제 황태후(황후) 황태자
황세저포(黃細苧布) 10 - -
백세저포(白細苧布) 20 20 10
황세면주(黃細綿紬) 20 - -
백세면주(白細綿紬) 20 10 10
용문염석(龍紋簾席) 2 - -
황화석(黃花席) 20 10 10
만화석(滿花席) 20 10 10
만화방석(滿花方席) 20 - -
잡채방석(雜彩方席) 20 10 10
백면지(白綿紙) 1,300 - 500
나전소함(螺鈿梳函) - 1 -
홍세저포(紅細苧布) - 10 -
자세면주(紫細綿紬) - 20 -
✽전해종, 『한중 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82쪽.

조선이 중국에 보낸 외교 선물 중에는 환관(宦官)과 공녀(貢女)도 있었다. 화자(火者) 등으로 불리는 엄인(閹人)과 처녀의 진헌은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 명나라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의 사례를 보면 1394년 5명을 시작으로 1403년 35명, 1404년 10명, 1405년 8명, 1407년 29명, 1417년 10여 명의 엄인과 처녀를 중국에 조공으로 보냈다. 인원수는 얼 마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선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컸다.18)박원호, 앞의 글,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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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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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 출신의 환관이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부린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온 명나라 사신 일행 중 한 명이었던 환관 주윤단(朱允端)은 자신의 친척 60명에게 관직을 줄 것을 강요하였다. 1425년(세종 7)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의 요구로 서흥군(瑞興郡)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킨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 와서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켜 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처녀의 진헌은 1427년(세종 9)의 일곱 명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들며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시비(侍婢) 등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처녀의 진헌은 조선 사회에 조혼 풍습을 만들어 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9)박원호, 앞의 글, 326∼328쪽.

다음으로 금은에 대하여 살펴보자. 금은이 풍부하지 않아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는데도 중국에서는 조선에 금은의 진헌을 요구하였다. 조선에서는 금과 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중국 정부에 대하여 금은을 공납 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냈다. 1429년(세종 11)의 일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금은 면공(金銀免貢)’이라고 한다. 금과 은이 공물 대상에서 제외되는 대신에 다른 품목이 추가되어 전체적인 물종(物種)의 수량은 증가되었다. 예를 들면, 금은 면공 이후 말(馬)이라든가 주(紬)가 진상품으로 추가되었다. 이 밖에도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중국에 보내는 선물은 매우 다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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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
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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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파견된 중국 사신이 공식적인 선물 외에도 개인적으로 증여받거나 구청(求請)을 통하여 얻어 가는 품목도 매우 다양하였다. 다음은 윤봉이 중국으로 귀국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00여 궤나 되었다. 궤짝 하나를 메고 가려면 (장정) 여덟 명을 써야 한다. 태평관에서 영천 고개(沙峴)까지 궤짝을 메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중국) 사신의 물품 요구가 이렇게 많은 적은 없었다.20)『세종실록』 권45, 세종 11년 7월 경신 ; 박원호, 앞의 글, 305쪽 ; 『서울 600년사』 한성부시대(1), 입명 사절의 증여 http://seoul600.visitseoul.net.

그들은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치부(致富)할 기회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으로 돌아간 사신은 조선에서 받은 선물을 황제를 비롯한 여러 고관에게 다시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외교 선물의 순환과 반복이 조선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유지시키는 동력의 하나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한편, 조선은 중국에 선물을 제공한 대가로 상사물(賞賜物) 또는 회사물(回賜物)이라 부르는 또 다른 선물을 받았다. 『통문관지』에는 사행별로 답례품의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지사 채단 5표리와 은자 250냥이 지급되었고, 정조사에 대해서는 채단 5표리, 은자 250냥과 준마 1필인데, 영롱(玲瓏)과 안점(鞍䩞)을 모두 갖추어 주었다. 성절사는 정조사와 동일하였다. 그리고 연공(年貢)에 대해서는 채단 5표리와 은자 250냥이다. 이상의 물품은 상통사(上通事)가 수령하여 귀국 후 승정원(承政院)에 바쳤다.21)『국역 통문관지』 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161쪽. 표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준 외교 선물의 정액’에는 청나라 후기에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회사품(回賜品)이 정리되어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듯 품목과 수량에 차이가 약간 보이고 있다.

<표>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준 외교 선물의 정액
사행(使行) 채단(綵緞)
(表裏)
초피(貂皮)
(張)
내장단(內粧緞) 및 운단(雲緞)
(疋)
안마(鞍馬)
(疋)
동지사 5 100 각 4 -
정조사 5 100 각 4 1
성절사 5 100 각 4 1
연공 5 100 각 4 -
✽전해종, 『한중 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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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관지』
『통문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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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는 조선의 사행원(使行員)에게도 물품을 증급(贈給)하였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정사(正使)·부사(副使) 각각 한 명씩을 비롯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서장관(書狀官) 한 명, 통역을 맡은 대통관(大通官) 세 명, 예물의 수송 책임자인 압물관(押物官) 24명과 함께 종인(從人) 30명 등 총 60명에게 지급될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동지사·정조사·성절사·연공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다.22)『국역 통문관지』 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161∼162쪽. 실제 지급된 내용은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데, 『광서회전사례(光緖會典事例)』를 이용하여 동지사행의 경우를 분석하면 표 ‘중국 황제가 동지사 일행에게 지급한 외교 선물’과 같다.23)전해종, 앞의 책, 84쪽. 여기에 정조사·성절사·연공에 대하여 지급되는 수량을 더하면 증답품(贈答品)의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

<표> 중국 황제가 동지사 일행에게 지급한 외교 선물
사행원
(使行員)
인원 대단주(大緞紬)
(表裏)
소단주(小緞紬)
(表裏)
은(銀)
(兩)
황견(黃絹)
(疋)
안마(鞍馬)
(疋)
청포(靑布)
(疋)
정사(正使)
부사(副使)
2 20 - 400 12 4 -
서장관
(書狀官)
1 6 - 180 4 - -
대통관
(大通官)
3 9 - 300 12 - -
압물관
(押物官)
24 - 72 1,680 - - 192
종인
(從人)
30 - - 540 - - -
60 35 72 3,100 28 4 192
✽전해종, 『한중 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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