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1. 동아시아 외교와 선물 교환
  • 동아시아의 외교 선물 교환
  • 일본에서 오는 외교 사절에 의한 증여
정성일

예물 교환의 대상은 한 나라나 한 사회에서 희소가치를 갖는 물건들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외교 선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인 조선 국왕과 일본의 쇼군 사이에 교환되는 통신사(通信使)와 그 밑의 외교 실무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례 송사(年例送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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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중 정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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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중 정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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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 국왕과 일본의 쇼군 사이에 주고받은 국서를 통해서 두 나라가 외교 선물을 교환하는 구조와 실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1682년(숙종 8)의 통신사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의 국서에 딸린 별폭을 보면, 인삼 50근을 비롯하여 대수자(大繻子) 10필, 대단자(大緞子) 10필, 색대사(色大紗) 20필, 백조포(白照布) 20필, 황조포(黃照布) 20필, 곤포(坤布) 30필, 호피(虎皮) 15장, 표피(豹皮) 20장, 청피(靑皮) 30장, 어피(魚皮) 100장, 색지(色紙) 30권, 색필(色筆) 50자루, 참먹(眞墨) 50홀, 황밀(黃蜜) 100근, 꿀(淸蜜) 10호, 매(鷹子) 10연, 안구를 갖춘 준마(駿馬鞍具) 2필 등 18개 품목이 열거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쇼군의 국서에는 창(鑓) 100자루, 철금 시회 안구(撤金蒔繪鞍具) 20장, 금지 화병풍(金地畵屛風) 20쌍, 철금 시회 광개(撤金蒔繪廣蓋) 10매, 채문복(綵紋服) 50령 등 다섯 가지 예물이 적혀 있다.24)이원식, 『조선 통신사』, 민음사, 1991, 118쪽.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국서 별폭에 기재된 예물만 교환하는 것은 아니었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 따르면 예단(禮單)을 공사(公私)로 나누어 공예단과 사예단으로 구분하고 있다. 쇼군을 비롯하여 바쿠후의 관료에게 지급하는 공예단의 전체 수량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인삼 118근, 대수자 10필, 대단자 40필, 대릉자(大綾子) 20필, 백저포(白苧布) 160필, 생저 포(生苧布) 50필, 백면주(白綿紬) 125필, 흑마포(黑麻布) 75필, 백목면(白木綿) 20필, 호피 55장, 표피 54장, 청서피(靑黍皮) 47장, 어피 200장, 색지 90권, 채화석(彩花席) 20장, 각색필 150자루, 황모필 40자루, 참먹 170개, 황밀 100근, 꿀 10말, 안구를 갖춘 준마 6필, 매 46마리, 화연(花硯) 10면, 화석 36장, 유둔(油芚) 27부 등이다. 여기에 사예단을 포함하면 조선이 지급한 예물의 규모는 더 커지게 된다.25)김건서(金健瑞), 하우봉·홍성덕 옮김, 『국역 증정교린지(國譯增正交隣志)』, 민족문화추진회, 1998, 193∼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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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정교린지』
『증정교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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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바쿠후도 통신사행에 참가한 조선의 사행원에게 따로 예물(回禮)을 지급하였는데, 은이 가장 대표적인 답례품이었다. 1682년(숙종 8)의 경우 삼사(三使)에게 각각 은 500매와 면(綿) 200파를, 상상관(당상역관) 세 명에게 각각 은 200매를 지급하였다. 상통사에게 각각 은 50매씩, 제술관(학사)에게 은 30매, 상관·차관 50명에게 합계 은 500매, 중관·하관 330명에게 합계 은 1,000매를 지급하였다. 또 마상재(馬上才)에게 각각 은 100매씩이 지급되었다. 이상은 쇼군으로부터 지급받은 것이다. 이와 별도로 저군(儲君)으로부터 삼사에게 각각 은 200매씩, 상상관에게 각각 은 100매씩, 상판사와 학사에게 각각 은 20매씩, 상관·차관 50명에게 합계 은 200매, 그리고 중관·하관 330명에게 합계 은 300매가 증여되었다. 이 밖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종실(宗室)로부터 삼사에게 각각 은 200매씩, 상상관에게 각각 은 50매씩이 전달되었으며, 바쿠후의 집정(執政)이 삼사에게 은 100매씩을 보내왔다.26)이원식, 앞의 책, 1991, 119쪽.

그런데 이 은자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1682년의 경우에는 모두 오사카(大坂)에서 조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748년(영조 24) 통신사행에 종사관으로 참가했던 조명채(曺命采)의 『봉사일본문견록(奉使日本聞見錄)』에 따르면, 과거에는 이와 같은 회례은(回禮銀)을 오사카와 에도(江戶)에서 각각 절반씩 조달하였는데, 1748년에는 모두 에도에서 조달하였다고 한다.27)『국역 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 10, 민족문화추진회, 1977, 253쪽. 일본이 필요한 은화를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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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백연향(關白讌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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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신사행의 역관이었던 홍우재(洪禹載)는 『동사록(東槎錄)』에서 이렇게 받은 은이 모두 1만 6,724냥에 이르렀으며, 이것을 모두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우 요시자네(宗義眞)에게 주어 전례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8)『국역 해행총재』 6, 민족문화추진회, 1975, 227∼228쪽. 1764년(영조 40) 통신사행에 정사로 참가한 조엄(趙曮)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의 각처에서 예물로 받은 회례은이 1만 3,112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보다 약간 규모가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예에 따라 그 중 8,000냥을 조선이 공무역에서 일본에 지급해야 할 공목(公木) 200동(1만 필에 해당함)의 대금으로 대마도에 지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호조(3,000냥)와 병조(100냥)에서 빌린 것과 본청에서 대출(150냥)을 해서 가져온 것을 모두 여기에서 갚은 다음, 나머지 금액을 복선장(卜船將)·도훈도(都訓導) 이하 일행에게 직책별로 차등 있게 분배하였다고 한다.29)『국역 해행총재』 7, 민족문화추진회, 1975, 227쪽, 478∼479쪽. 일본에서 받은 회답 선물을 나누는 조선의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다음으로, 조선과 일본의 외교 실무자 사이에서 주고받은 외교 선물에 대해서 살펴보자.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조선의 예조 참의를 비롯하 여 동래 부사나 부산 첨사가 일본의 대마도주와 주고받은 서계가 다량 소장되어 있어 외교 실무자 사이에서 교환된 예물의 종류와 수량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1614년(광해군 6)∼1699년(숙종 25) 사이에 조선이 일본에 보낸 서계의 별폭을 통하여 조선의 외교 선물(증여)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계 별폭 안에 기재되어 있는 예물의 종류는 대략 55개에 이른다. 그 가운데 인삼을 비롯하여 백면주·백목면·백저포 등 12개 품목만 비교적 전 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지급되었을 뿐, 나머지 품목은 특정한 시기에만 별폭에 등장한다. 교환이 빈번하지 못하였던 품목은 전체 거래량은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품목이 기재된 별폭은 대체로 특수한 목적(예컨대 애경(哀慶) 등)을 지닌 사행의 경우에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면포·쌀·콩과 같이 특정 시기에만 별폭에 기재되어 있는 품목도 있다. 예를 들면, 면포는 1637년까지만 별폭에 기재되고 그 이후부터는 물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또 쌀과 콩은 1624∼1637년 사이에는 해마다 하사(下賜)하는 쌀과 콩이라는 의미로 ‘세사미태(歲賜米太)’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1638년에는 ‘세사’가 빠진 ‘미태’로 기록되어 있다. 또 1639∼1645년에는 ‘하사’라는 의미 대신에 ‘발송한다’는 뜻으로 ‘세송미태(歲送米太)’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646년부터는 완전히 서계 별폭에서 제외되었다. 사(賜)라는 글자가 외교 문서 속에 포함된 것은 조선이 대국(大國)으로서 소국(小國)인 대마도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글자가 1638년 이후 다른 글자로 바뀌거나 아예 사라지는 것은 외교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635년 대마도에서 저지른 국서 위조 사건이 처리되고 겸대제(兼帶制)가 실시되는 등 이전과 다른 외교 환경의 변화가 외교 문서의 형식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30)정성일, 앞의 책, 24∼25쪽.

단위당 수량이 가장 많은 품목은 2만 1,407자루를 보낸 황모필(黃毛筆)과 2만 350홀(笏)을 보낸 진묵(眞墨)으로 모두 필기구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인삼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예물은 없었다. 당시에도 조선을 대표하는 상품이었던 인삼은 같은 기간 동안 모두 1,567근이 지급되었고, 가장 수량이 많았던 1659년에는 총 111근의 인삼이 서계와 함께 일본에 지급되었다. 기록이 남아 있는 해만을 대상으로 하여 평균을 계산해 보면 1년에 약 21근 가량이 외교 문서(서계 별폭)의 교환을 통해서 지급된 셈인데, 기록 누락 등을 감안한다면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31)정성일, 앞의 책, 25∼26쪽. 통신사 빙례(聘禮)가 있을 때에는 더 많은 인삼이 일본에 지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위해서 보낸 수량까지 포함한다면 조선에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유입된 인삼의 숫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 지급한 인삼이 대부분 재배삼인 가삼(家蔘)이 아니라 자연에서 채취한 산삼이나 그에 준하는 물품이었으므로, 인삼과 같은 예물이 외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행한 역할은 자못 크다 하겠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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