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1. 동아시아 외교와 선물 교환
  • 동아시아의 외교 선물 교환
  • 외교 선물의 가치 비교
정성일

조선이 중국에 예물을 증여하면 반드시 중국의 답례가 뒤따랐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선이 중국에 전달한 예물과 중국이 조선에 지급한 예물의 경제적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선물의 속성상 경제적 반대급부를 사전에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선물을 받은 쪽에서 선물을 준 쪽에 답례로 전달하는 선물, 즉 회례 또는 회사가 실제로는 의무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선물이 경제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조선이 중국에 전달한 선물과 중국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 어느 쪽의 가치가 더 큰가를 비교하는 것은 선물 체제의 근본적인 관심 사항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더욱이 양국 사이의 이러한 선물 교환이 어느 쪽에 경제적으로 더 유리한지는 적어도 근대 이전의 외교 관계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였다. 근대 이전 동아시아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선물의 교환은 경제적 동기 보다는 정치적·문화적 동기가 더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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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극돈의 봉사도-3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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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극돈의 봉사도-14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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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극돈의 봉사도-16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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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극돈의 봉사도-18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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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는 하지만 조선과 중국이 교환한 선물의 가치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은 선물의 가치에 대해서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먼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해종의 연구가 있다. 그는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 나오는 물품의 가격을 가지고 조선에서 청나라에 가는 사신이 가져가는 예물(방물)의 가치와 그 대가로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예물의 가치를 비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선물 가치가 중국의 선물 가치보다 10배가량 많았다고 한다. 즉, 조선이 중국에 보낸 예물의 가치가 10이라고 한다면, 그 대가로 중국의 황제가 조선 의 국왕 및 그 일족에게 증여한 물품의 가치가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32)전해종, 앞의 책, 85쪽. 더 나아가 그는 의례 관계가 중심이 되는 전형적 조공 관계가 조선의 경제에 막대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33)다른 연구 결과에서도 청나라와의 외교 비용이 조선의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예를 들어, 병자호란 직후의 세폐(歲幣) 가치를 순조 초기인 19세기 초의 물가로 환산한다면 30만 냥 가량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순조 초기 조선의 중앙 관서에서 쓰는 연간 비용이 130만 냥인 점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높은 비중이다. 또 청나라 사신에게 준 선물의 가치를 따져 보면 순조 초기 청사(淸使) 1회 접대 비용이 23만 냥에 이르는데, 그 이전에는 이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서울 600년사』, 대청 무역 http://seoul600. visitseoul.net. 조선의 국가 재정상 연평균 전(錢) 20만 냥 이상 손실을 입고 있었으며, 중국 사신의 행차가 있는 해에는 40만 냥에 달하는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청나라도 조선의 사신에 대한 접대 등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어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청나라의 칙사 파견 횟수가 줄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재정 부담에서 벗어나려 한 증거라는 것이다.34)전해종, 앞의 책,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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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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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어떠하였을까? 조엄은 『해사일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동래 부사를 역임한 적이 있기 때문인지 이 문제에 매우 정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동래부에 있을 때 해마다 왜(일본)에게 주는 재산을 계산해 보니, …… 한 해 주는 물건 값이 통틀어 30만 냥이 훨씬 넘는다. 늘 하는 말이 ‘영남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나는 재산이 모두 왜에게 주는 것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수가 정말 많다. 이에 반해서 그들이 바치는 것은 …… 우리가 주는 것과 비교한다면 10분의 1 정도라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35)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10월 28일조 ; 『국역 해행총재』 7, 민족문화추진회, 1975, 66쪽 ; 이원식, 앞의 책, 122쪽.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은 조엄이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조선이 일본에 10을 선물하였다고 하면 그 대가로 일본에서 받은 선물의 가 치는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으로 평가한 결과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 사람들이 느꼈을 선물의 가치가 이것과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요즘도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칙사 대접(勅使待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대접을 아주 잘 받았다.’는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지나친 환대를 받는 경우를 비꼬는 뜻으로도 곧잘 쓰는 말이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 사신을 접대할 때 느끼는 부담을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도 느끼지 않았을까? 외교 선물 교환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다.’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개인이든 국가이든 그런 관계를 지속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조선·일본·중국이 외교 선물 교환 체제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왜 동북아시아 삼국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러한 외교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였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경제 이외의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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