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3. 외교 선물 교환과 밀무역
  • 외교 선물 교환과 진짜 가짜의 숨바꼭질
정성일

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상품을 예물로 선정하여 상대국에 지급할 때에는 수량은 물론 품질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고, 이와 관련하여 엄격한 규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늘 규칙과 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외교 선물로 선정된 물품에 품질이 나쁜 것을 끼워 넣는 일도 있었다. 일반 상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역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이든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한 법망(法網)을 피해 보려는 욕심을 품게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국가니 외교니 하는 것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고도의 관념적인 개념이다. 일반 상인이나 서민들 처지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국가적 신뢰나 상도덕(商道德)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인삼처럼 부피도 작고 무게도 가벼우면서 고가품인 경우에는 진품으로 위조한 가짜를 만들려는 유혹이 더욱 강해진다.

조삼(造蔘)이나 위삼(僞蔘) 같은 가짜 인삼의 역사는 매우 길며, 방법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인삼을 거래할 때에는 보통 무게를 달아서 값을 매겼던 관례 때문이었는지 가짜 인삼은 대부분 무게를 늘리기 위해 가운데에 심을 박았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것처럼 수입산 조기나 꽃게에서 납 덩어리가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조엄은 『해사일기』에서 이와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에 선물로 전달하기 위하여 가져간 예단삼(禮單蔘) 속에 불량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매우 당황하였다. 1764년(영조 40) 2월 24일 에도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의 각처에 보낼 예물을 전례에 비추어 단자(單子)를 쓰고 물품을 확인하던 중 심각한 잘못을 발견한 것이다. 인삼은 통신사 일행이 한양을 출발할 때, 즉 여행 경비 명목으로 받아 온 반전(盤纏)인데, 호조에서 지급한 것에 간혹 꿀에 담가 놓았던 불량품이 많이 들어 있었다. 조엄이 동래 부사로 재직할 때에도 밀매상들이 가져오는 인삼을 많이 보았지만, 그때는 이처럼 인삼을 꿀에 담근 것은 없었다. 그는 5∼6년 사이에 인심이 나빠지고, 이익을 노리는 수법이 더욱 교묘해졌으며, 이러한 못된 버릇이 점차 왜관에까지 확산되었다고 들으니, 매우 해괴하고 미웠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약으로 쓸 인삼을 대상으로 하여 남을 속여 재물을 취한다는 것은 사리로 보아 해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하물며 이것은 두 나라 사이에 교제하는 폐물(幣物)인데 어찌 차마 꿀에 담가서 무게를 늘리려고 하였을까. 이는 진실로 이웃 나라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다.62)조엄, 『해사일기』, 연화(筵話) 7월 8일.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가져가는 인삼을 가리켜 특별히 ‘신삼(信蔘)’이라는 용어를 썼다. ‘믿음을 서로 통한다’는 의미로 통신(通信)이라 하였고, 그 징표로 가져가는 대표적인 선물이었던 인삼을 신삼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예물 가운데 불량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국가 위신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조엄은 역관을 시켜서 예단으로 쓸 것 중에서 꿀에 담근 것을 일일이 추려 낸 다음, 숫자를 헤아려서 장차 호조에 반납하여 이것을 증거로 삼아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을 징벌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불량삼 대신에 노자(路資)로 쓰기 위해 마련해 둔 것 중에서 바꾸어 사용하게 하였다.

인삼은 수분의 증발 때문에 때에 따라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이번 일로 손해를 본 인삼은 한 근 남짓 되었다. 이것 역시 노자용에서 충당하고, 그래도 부족한 것은 다른 물건으로 대신 지급하였다. 이렇게 해서 1764년의 통신사행 때 일어난 신삼의 위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63)『국역 해행총재』 7, 민족문화추진회, 1975, 200∼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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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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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전에도 통신사가 가져갈 인삼의 검사를 사전에 철저히 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을 보면 품질이 불량한 위조 인삼이 이미 있었음이 틀림없다.64)今村鞆, 『人蔘史』 2·人蔘政治篇, 朝鮮總督府 專賣局, 1935, 329∼333쪽. 또한 인삼 위조는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조태억(趙泰億)이 정사로 다녀온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 때에도 이 문제가 두 나라 사이에 논의되었다. 1712년 2월 13일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는 길에 대마도에 이르러 이정암(以酊庵)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다. 상선연(上船宴)이 끝나자 대마도의 봉행(奉行)이 “인삼은 사람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 매우 중요하거늘, 근래에 위조 인삼이 아주 많으니, 삼을 캐는 채삼인(採蔘人)이나 장사치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시켜 이러한 폐단이 없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65)임수간, 『동사일기』, 『국역 해행총재』 9, 민족문화추진회, 1977, 289∼290쪽. 당시 외교 선물의 하나였던 인삼의 위조 문제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대마도)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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