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1. 닥나무로 만든 한지
  • 종이의 발명
김덕진

종이는 문자를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발명되었다. 그렇지만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재료일 뿐만 아니라 붓·먹·벼루와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선비들이 늘 곁에 두고 사용하였고, 국가나 개인이 교제할 때 증여품으로 쓸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였다. 우리나라는 닥나무를 주원료로 사용하여 닥나무의 긴 섬유질을 그대로 살려 맑은 물에 표백하고 방망이질을 하여 종이를 제조하였다. 이러한 우리 종이는 색깔이 아름답고 표면이 부드러운 데다가 단단하고 질겨서 먹을 잘 흡수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 종이는 국내에서 애용됨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품(名品)으로 소문나 일찍부터 선물로 각광받았다. 특히 먹을 잘 흡수하는 우리 종이는 인쇄에 적합하여 출판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 문화 가운데 인쇄술이 세계적인 것으로 손꼽힐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질 좋은 종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들이 남긴 유물, 유적, 기록을 통해 유추하고 있다. 무덤에 그려진 벽화나 오래된 집터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으로 우리 인류의 흔적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지만, 기록으로 남은 문자를 통하여 살필 때 그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여 왔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는 기원전 3000년 이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이 무렵에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과 중국의 황허(黃河) 강 유역에서도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계 4대 문명의 역사를 통해 지구상에서 문자를 사용한 지가 5000년 정도 지났음을 알 수 있다.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것으로 종이만한 것이 없으나 우리 인류가 종이를 만들어 사용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면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어디에 문자를 기록하였을까?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흙, 돌, 금속, 나무, 풀, 가죽, 뼈, 비단 등에 글자를 썼다.

『후한서(後漢書)』(권 108)에 한나라의 환관인 채륜(蔡倫, ?∼121)이 105년에 나무껍질, 삼, 천 조각, 고기 그물을 가지고 종이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종이는 그의 성을 따서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렸고, 채륜은 종이를 만들어 바친 공로로 제후에 책봉되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채륜이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종이의 발명으로 그동안 사용해 오던 다른 서사(書寫) 재료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종이의 역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채륜 이전에도 종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년에 중국의 허신(許愼, 30∼124)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권 13)에 지(紙) 자가 생긴 유래와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해 놓았는데, 헌 비단을 물속에서 두드리면 종이가 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삼(麻)으로 만든 것이어서 비단은 종이의 재료가 아니었던 듯하다.

1933년에 중국 북서쪽에 있는 신장(新彊) 지방에서 가로 4㎝, 세로 10㎝의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채륜의 종이보다 154년이나 앞선 기원전 49 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종이는 질이 매우 조악하고 거칠며, 지면(紙面)에는 삼 줄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종이가 막 발명될 무렵의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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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중국 간쑤(甘肅)성 팡마탄(放馬灘)에서 삼으로 만든 종이가 발굴되었는데, 채륜의 종이보다 200∼300년 앞선 기원전 2세기 것으로 추정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종이는 기록용이 아니라 물건 포장용이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없으므로 진정한 최초의 종이는 여전히 채후지라는 주장과, 지도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팡마탄지가 최초의 종이이고 채륜은 팡마탄지의 품질을 높이고 보편화시켰을 뿐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러한 논쟁으로 보아 채륜이 최초의 종이 발명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이전에 있었던 종이의 품질과 생산성을 높여 널리 보급하였던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무는 서사 재료로 흙이나 청동보다 큰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많은 글자를 써넣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무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비단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가볍고 필기하기가 쉬우며 운반과 보관이 편리한 비단은 값이 비싸 황실이나 상류층이 아니면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나무의 경제성과 실용성, 그리고 비단의 운반과 보관의 편리성을 두루 갖춘 혁신적인 서사 재료가 중국에서 등장하였다. 그것이 바로 종이이다. 2세기에 채륜이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종이를 널리 보급하자 그때까지 기록의 대명사였던 목간(木簡)은 점차 사용이 줄어들어 4세기에 이르러서는 부차적인 서사 재료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이가 발명되고 개량된 이후에 인류는 본격적으로 지식을 전파하여 문화를 급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서사 재료는 교류를 통하여 주변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창안된 점토판(粘土版)은 인근 이집트로 전파되었고,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는 바다 건너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전래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쓰던 양피지(羊皮紙) 또한 유럽에 건너가 중세 기독교 문화를 이끌었다.

종이는 국지적 교류를 초월하여 전 세계의 동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동쪽으로는 한반도를 거쳐 7세기에 일본에 도착하였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 ?∼755)이다.71)지배선, 『고선지 평전: 유럽 문명의 아버지』, 청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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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전파 추이
종이의 전파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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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문명의 교류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고선지는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인 지금의 파키스탄 동남쪽 사르하드를 공격할 때 눈으로 뒤덮인 파미르 고원을 돌파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751년 당나라의 영토를 노리며 동진하던 석국(石國, 지금의 타슈겐트)과 이슬람 연합 군대와 부딪힌 탈라스 전투에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당하였다. 고선지의 패배와 함께 중앙아시아는 아랍권으로 넘어가 이슬람화되었다.

탈라스 전투에 패한 당나라 군은 이슬람 군에게 2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중에는 제지 기술자를 비롯하여 여러 직종의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그 제지 기술자에 의해 사마르칸트에 최초의 제지소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바그다드에 생겼다. 이들 이슬람 대도시에서 생산된 종이는 대부분 코란(Koran)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에서 발생한 제지술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에 보급되었다. 이후 12세기에는 이슬람 세계와 인접해 있는 유럽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전파되어 전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종이와 함께 중국의 목판 인쇄술도 유럽에 알려져 최초의 인쇄물로 트럼프(playing card)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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