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1. 닥나무로 만든 한지
  • 닥나무로 만든 한지
김덕진

종이의 원료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은 “무릇 풀의 껍질이나 두껍고 연한 것은 모두 종이를 만들 수 있다.”74)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9, 지품변증설(紙品辨證說).고 하였으니, 자연에서 자라는 나무나 풀이면 종이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연 수목 초엽 가운데 우리는 대부분 마(麻, 삼)와 저(楮,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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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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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대성산 국사봉 유적에서 발견된 종이는 삼으로 만든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마지(麻紙)는 오늘날까지도 깨끗하고 흰빛을 띠고 있다고 한다. 858년(헌안왕 2)에 필사된 『백지묵서 금광명경(白紙墨書金光明經)』도 마지를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민정 문서에는 당시 촌락에 심던 삼,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의 수가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당시에 재배하던 수목으로 잣, 호두, 살구, 복숭아, 배, 밤, 대마, 저마 등이 나온다. 닥나무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 않고 마가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마지를 널리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발간된 책 가운데는 마지로 만든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삼대의 껍질로 만든 마골지(麻骨紙)가 생산되었으나 먹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751년(경덕왕 10) 무렵에 제작되어 1966년 발견될 때까지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12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판으로 찍은 7m 가량의 두루마리로 닥나무를 종이 원료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은 이 종이를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지만, 중국 학자들은 당나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인의 종이 제작은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분명히 신라 종이로 만든 것이다.

754년(경덕왕 13) 8월에 착수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원명은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말미에 붙은 발문(跋文)에 의하면, 사경(寫經)에 필요한 종이를 마련하기 위하여 닥나무를 재배하는데, 그 나무의 뿌리에 향수를 뿌려 정결하게 가꾸었으며 다 자라면 껍질을 벗겨 삶아 쪄서 사경지(寫經紙)를 만들었고, 이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살계를 받고 목욕재계하면서 정성껏 종이를 만들었다 한다. 또 사경에 참여한 제지 기술자를 지작인(紙作人), 필경사를 경필사(經筆師)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닥나무를 재배하고 제지공을 두어 종이를 직접 제작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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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형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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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경 외에 일본 나라 도다이사(東大寺)의 쇼소인에 소장된 통일신라시대의 민정 문서도 닥종이로 만든 것이다. 민정 문서는 신라 장적 문서, 신라 장적이라고도 하는데 8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고, 1933년에 발견되었다. 쇼소인에는 이 문서 외에도 신라에서 수입한 사파리라는 유기 그릇 속에 문서가 수박되어 있고, 유기 수저를 포장한 종이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종이도 모두 닥종이이다. 이상의 사례로 보아 닥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종이의 원료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책이나 문서는 대부분 닥종이로 만든 것이다. 순천 송광사에 보관 중인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13세기 초 작성, 송광사의 창건 연혁과 사찰의 배치 상황 및 승려 수와 재산 목록 기록)와 ‘노비첩’(1281년 작성,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를 송광사에 바친다는 내용 기록) 또한 닥종이로 만들었다. 송나라의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75)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7, 물산지(物産志), 지(紙).고 하였고,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고려의 종이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것은 다른 원료를 쓰지 않고 닥나무만을 썼기 때문이다. 그 종이가 하도 반드럽고 질기고 두꺼워서 중국인들은 견지(繭紙, 누에고치 종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고려의 종이는 대부분 저 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닥나무를 주원료로 하는 제지법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닥나무가 부족할 경우에는 뽕나무, 버드나무, 댓잎, 율무나무, 솔잎, 칡 껍질, 삼대 껍질, 보리 짚, 지푸라기, 쑥대, 창포대 등을 함께 섞어 종이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종이는 순수 닥종이에 비하여 품질이 떨어져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종이인 한지(韓紙)를 닥나무로 만든 종이라 하여 저지(楮紙, 닥종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종이라는 말의 어원이 저피(楮皮, 닥 껍질)에서 나왔다고 추측하고 있다. 저피가 조비로, 다시 조해로, 그리고 종이로 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이라는 단어 속에 우리 종이의 성격이 담겨 있어 한지는 응당 닥종이를 의미한다. 최근에 저보다 먼저 들어온 지(紙)라는 글자의 중국 음이 변하여 종이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어 어원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닥종이는 색깔이 희고 강도가 튼튼하고 질기며 표면이 매끄럽고 먹을 잘 받아 중국·일본 등지에서 명품으로 평가받았다. 색깔이 희기 때문에 닥종이를 백지(白紙)라고 하고, 백지를 가장 널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염색을 하여 색지(色紙)를 간혹 쓰기도 하였는데,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이 썼던 종이는 푸른 빛깔의 청지(靑紙)였다 하고, 불경에는 누런 색깔의 황지(黃紙)가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와 달리 중국에서는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황지를 많이 썼다.

남북국시대까지는 닥나무와 삼(麻)을 사용하였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면 주로 닥나무를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닥나무는 재배가 쉽고 번식이 잘 되며 가공도 쉬워 질이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2세기 이후에 공물(貢物)을 삼베로 대신 납부하는 경우와 삼베를 화폐로 대용(代用)하는 일이 성행하면서 직물·그물·실의 주요 원료였던 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도 삼보다 닥나무를 선호하게 만든 원인으로 보인다.

12세기에 이르러 불교 경전과 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이 활발하게 발간되자 종이의 수요도 크게 증가하였다. 필요한 종이를 확보하려면 닥나무가 있어야 하므로 고려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였다. 한 가지 예를 『고려사』에서 보면, 1188년(명종 18)에 국왕은 “뽕나무·닥나무·밤나무·잣나무·배나무·대추나무 등 과일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때를 맞추어 심어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할 것이다.”76)『고려사』 권79, 지(志)33, 식화(食貨)2, 농상(農桑).고 하였다.

고려의 닥종이는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우리 종이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된다. 조선 정부에서는 늘어나는 닥종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빈 땅이 있으면 닥나무를 심어 국가의 쓰임에 보탬이 되도록 하거나 민가나 지방 관부(官府)에서 저전(楮田, 닥나무 밭)을 소유하게 하여 닥나무 재배를 적극 권장하였다. 닥나무 외에 칠·뽕나무·과수·왕골·대나무가 생산되는 곳을 기록하여 호조와 해당 도와 고을에서 관리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하였다.77)『경국대전(經國大典)』 권6, 공전(工典), 재식(裁植). 그뿐만 아니라 닥나무 품질을 개량하기 위해 왜저(倭楮, 일본 닥나무)를 수입하여 남해안 지방에 시험 재배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국 도처에서 닥(또는 종이)이 생산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15세기에는 경기도 1곳, 충청도 13곳, 경상도 4곳, 전라도 33곳, 황해도 5곳, 강원도 12곳, 평안도 32곳 등 모두 103곳에서 닥나무가 산출된 것을 알 수 있다.

종이 산업이 발달하면서 닥나무 수요가 늘어나 품귀나 가격 폭등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값도 만만치 않아 수입이 좋았기 때문에 닥나무 재배로 생업을 꾸리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이 지은 『천일록(千一錄)』에 의하면,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닥나무 재배를 생업으로 삼는 자들이 많았다.78)우하영(禹夏永), 『천일록(千一錄)』 권1, 호남(湖南), 생리(生理). 닥나무를 통째로 파는 것보다 껍질을 벗겨 팔면 노역(勞役)을 해야 하지만 수입은 더 나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 위정자들은 닥나무를 재배하면 이익이 많아 백성들의 생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권장하였다.

생산지도 증가하였다. 1795년(정조 19)에 전라 감사 서정수(徐鼎修)가 보고한 문건에 의하면, 관아에서 관리하는 저전이 35곳이고, 개인이 운영하는 저전이 2,701곳이나 되었다. 본래 산간 지역이 닥나무의 주요 산출 지역이었으나,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평지나 멀리 도서(島嶼) 지역에까지 재배지가 확산되었다. 이렇게 닥나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농학자들도 닥나무의 재배와 가공에 관심을 가져 각종 농서(農書)에 닥나무 관련 기사가 수록되었다.

<표> 조선시대 닥나무 산출 고을
       도
책 이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평안 함경
『세종실록지리지』 1 13 4 33 5 15 32 0
『동국여지승람』 0 0 14 16 1 0 6 0
『동국여지도』 0 0 11 23 1 0 8 0
『임원경제지』 2 0 13 26 0 1 4 0
『대동지지』 3 6 24 41 1 1 7 0
『여재촬요』 0 2 16 14 2 2 5 0
6 21 82 153 10 19 62 0

닥나무는 뽕나뭇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으로, 3m 정도의 크기로 성장한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안종수(安宗洙, 1859∼1895)의 『농정신편(農政新編)』 등에 따르면, 닥나무는 땅이 꼭 비옥하지 않아도 되고, 돌무더기 주변 건조한 땅에 심는 것이 좋으며, 한랭한 지방일지라도 양지바른 곳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닥나무는 한반도 전역 어느 곳이나 잘 자라지만,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잘 자란다. 오늘날까지도 이 두 지역에서 한지 생산이 전승되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 있다.

닥나무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한지 재료로 흔히 쓰는 것에는 참닥나무·삼지닥나무·산닥나무 등이 있는데, 참닥나무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참닥은 섬유가 잘 풀리고 조롱이 생기지 않아 종이를 뜨면 바닥이 고르다. 닥나무는 재배한 지 3년이면 베어 사용할 수 있는데, 제지용으로는 일년생 가지가 좋다. 섣달에 베어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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