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2. 한지의 명품과 명산지
  • 한지의 명산지
김덕진

전통 시대에 종이와 같은 수공업품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왕실, 중앙 관청, 지방 관청에 관영 수공업소를 설치하고 제조하여 직접 조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영 수공업소, 민간, 사찰, 소(所) 등지에 배정하고 상납하도록 하는 것이다. 각 왕조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실정에 맞게 활용하여 필요한 종이를 확보하였다.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에는 종이 생산지에 대한 관련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사찰이나 민간에서 주로 생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의 궁중 수공업이나 관영 수공업 생산품으로는 광물, 특산물, 약재, 직물, 세공품, 무기만 보이고 종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서적이 활발하게 출판되었고 종이가 외국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종이가 다량으로 생산되고 제지 기술도 크게 향상되었 다. 그런데 중앙에 무기, 직물, 의복, 장식품, 수레, 악기 등을 제조하는 수공업 기관이 있었지만 제지 기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94)송성안, 「고려 시기 관청 수공업(官廳手工業)의 존재 양상과 사원(寺院) 수공업」, 『경대사론(慶大史論)』 11, 1999. 따라서 왕실이나 중앙 관청에서는 필요한 종이를 백성들에게 공납(貢納)이라는 세금의 형태로 부과하여 상납하도록 하였다. 백성들에게 부과된 종이는 일반인이 만들기 어려운 특수한 물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소(所)라는 특수 행정 구역에서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향(鄕)·부곡(部曲)과 함께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자기소(瓷器所) 등의 소가 발달하였는데,95)『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경기도(京畿道)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 종이는 지소(紙所)에서 생산하여 중앙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시장에 팔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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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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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관청에는 지전(紙田)이란 이름의 토지 7∼15결 정도를 지급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사무용 종이를 조달하도록 하였다.96)『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田制). 지방 관청에서는 지소나 사찰에서 종이를 조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고 사원(寺院) 경제가 발달하여 사원의 수공업품 생산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생산품은 자체 수요에 충당하거나 시중에 내다 팔았다. 방대한 대장경을 사찰에서 조판하여 찍어 냈던 것으로 보아 종이의 생산도 활발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12세기 이후 사라지기 시작하던 소가 15세기에 완전히 소멸하자 민간이나 사찰에서의 종이 생산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종이의 생산량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1424년(세종 6)에 150권 분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600부를 인쇄하기 위하여 30만 권, 즉 600만 장의 종이가 소요되었으며,97)『세종실록』 권65, 세종 16년 7월 임진. 1458년(세조 4)에 대장경을 인쇄하기 위해 46만 권의 용지를 쓴 것을 보면 당시 종이의 생산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98)『세조실록』 권8, 세조 3년 6월 무오. 인쇄술이 발전하고 통치 체제가 정비되면서 각종 유학·역사·과학·지리·예절 서적이 활발하게 편찬되었고, 당시 그러한 서적 발간이 가능할 수 있도록 종이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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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소
조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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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종이가 필요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원료가 되는 닥나무 재배를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지방 수령에게 잘 관리하도록 당부하였다. 또 원료 부족과 품종 개량을 위하여 일본에서 닥나무를 들여와 재배하면서 풍토에 맞는지 시험하도록 하였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제지 기술을 도입하고 전수하도록 하여 제지술의 개량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조선 정부는 제지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 국가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폈음을 알 수 있다.

태종대에는 서울 창의문 밖(지금의 세검정 근처)에 조지소(造紙所, 1467년에 造紙署로 바뀜)라는 관영 종이 공장을 설치하여 조달하였다. 조지소에는 200여 명의 기술자가 배속되어 있었고, 운영을 맡은 관리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서는 처음에 저화(楮貨)라는 지폐용 종이와 외교 문서용 고급 종이를 생산하다가,99)『세종실록지리지』,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조지소(造紙所). 성현(成俔, 1439∼1504)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세종 때 조지소를 설치하여 서적을 인쇄할 여러 종류의 종이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품이 한 가지만 아니어서 고정지, 유엽지, 유목지, 의이지, 마골지, 순왜지가 있었다. 그 품질이 다 극히 정하고 인쇄한 서적 또한 훌륭하였다.”100)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0.고 한 바와 같이 점차 각종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였다. 이러한 조 지서는 고려에는 없는 것으로, 지장(紙匠)이라는 제지 기술자를 두고 백성들로부터 닥나무를 공물로 상납받아 종이를 제조하였다.

한편, 조지소만으로는 수요를 도저히 충족시키지 못하자 지방 관청, 사찰, 민간에 공납이나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종이 상납을 배정하였다. 예를 들어, 1434년(세종 16)에는 『자치통감』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종이를 조지소에 5만 권만 배정하고, 나머지를 경상도에 10만 5000권, 전라도에 7만 8000권, 충청도에 3만 3000권, 강원도에 3만 5000권씩 배정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상납하도록 배정한 종이와 자체적으로 필요한 종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관아에 지소(紙所)라는 관영 제지소를 고을별로 또는 몇몇 고을 단위로(이를 도회소(都會所)라고 한다) 두거나 사찰이나 민간 제지업자에게 납품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지방에는 705명의 지장이 있었고, 그들은 경상도(265명)·전라도(237명)·충청도(131명)에 집중되어 있었다.101)『경국대전』 권6, 공전(工典), 공장(工匠). 이들은 종이를 생산하여 중앙에 상납하거나 소속 관청에 납품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분은 상품으로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지나친 종이 상납 강요 때문에 사찰을 폐쇄하고 도망칠 지경이었다.

1423년(세종 5) 중국에 바칠 종이의 배정에서 보이듯 종이의 주요 산지는 하삼도(下三道, 전라·경상·충청도)였다. 하삼도가 조선 종이의 주원료인 닥나무 재배에 알맞은 풍토를 지닌 결과였다. 그래서 외공장(外工匠) 가운데 지장은 대부분 하삼도에 분포하였으며, 외교 문서용 최고급 종이를 한양에서 생산할 때 생기는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하삼도 지방에서 제조한 후 상납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하삼도 가운데 제지업은 전라도가 단연 활발하여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종이를 수출하였다. 전라도는 팔도 가운데 닥나무가 생산되는 곳이 가장 많았고, 제지 기술자는 경상도보다 적었지만 고을 수를 고려하면 매우 많은 편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가장 많은 제지 기술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고을은 전라도의 전주(23명)와 남원(23명)이었고, 그 다음으로 경상도 밀양에서 17명의 지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라도에서 종이 산지로 유명한 곳은 전주·남원·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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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방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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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세종 12)에 윤수(尹粹)가 “처음 조지소의 신설을 당하여 모두 이르기를, ‘종이의 품질이 반드시 남원이나 전주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조지소의 종이 품질이 대단히 좋아서 도리어 남원·전주의 종이를 쓰지 않고 있사오니…….”102)『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9월 기유.라고 하여, 전주·남원 종이의 품질을 조지소의 것에 비교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 전주 만마동에서 생산되는 것은 전국 최고였다. 특히 전주는 고려시대에도 명품 종이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남원 종이에 대하여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남원 종이는 색깔이 희고 윤택하여 품질이 서양 종이를 능가한다.”고 하였다. 서명응도 『보만재집』에서 조지서의 자문지, 평강의 설화지, 전주·남원의 선자지·간장지·주유지 등을 천하의 명품이라고 평하였다.

양질의 종이가 다량 생산된 결과 전라도에서는 서적 출판이 활발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29년(1753) 9월 23일자를 보면 “매우 요긴한 책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칙사(勅使, 중국의 사신)가 올 때마다 몇 권을 찍어 내어 중국에 보내는데, 그 판본이 호남 감영인 전주에 있다.”고 할 만큼 전주는 출판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방각본(坊刻本) 출간이 전라도의 전주·나주·태인에서 성행한 이유도 종이와 관련이 깊다. 아울러 전국 제일의 부채가 전주에서 생산되었던 것도 풍부한 대나무와 함께 양질의 종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종이 때문에 호남 지방민이 겪는 폐단은 매우 심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 또한 전라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 닥나무 를 재배하여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민가나 사찰에서는 많은 닥나무 밭을 가지고 있었다. 수입이 좋기도 하였지만 풍토가 닥나무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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