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2. 한지의 명품과 명산지
  • 도전받는 한지
김덕진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한지는 동아시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한지에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넓고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1539년(중종 34)에 사헌부의 보고를 보면 “요즘 종이 값은 날로 점점 뛰어오르는데 각급 기관의 공공사무에 쓰는 종이는 전보다 배나 두꺼워졌습니다. 풍저창·장흥고·교서관·봉상시에서 공물이나 전세로 받은 종이 등을 모두 거두어들여 달아 보니 길이와 너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다른 종이도 다 달아 보았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백성들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니 폐가 적지 않습니다. 다음부터는 아울러 공안(貢案)에 의거하여 근수(斤數)·길이·너비를 규격에 맞게 실시하게 하여 법을 따르지 않거나 전처럼 두꺼운 종이를 남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103)『중종실록』 권92, 중종 34년 11월 임자.라고 하였던 것처럼, 관청에서 백성에게 규정보다 크고 두꺼운 종이를 만들어 상납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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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試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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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 외에 과거 시험지도 규정보다 크고 두꺼운 종이를 쓰는 경우가 흔하였다. 시험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종이를 크고 두껍게 주문하는 선비들이 많아 말썽이 된 적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폐단을 접한 정부에서는 지나치게 두꺼운 종이를 쓰지 말라고 단속하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관공서나 개인 할 것 없이 두껍고 큰 것만을 지나치게 선호하여 자원 낭비가 심하였다.

종이의 품질은 날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한지의 품질에 대하여 회의를 나타내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종이가 천하에서 제일이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은 도대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서문장(徐文長)이 말하기를 ‘고려 종이는 그림 그리기에 적당하지 않다. 돈같이 두꺼운 것은 그래도 나은데 겨우 작은 해자(楷字)를 쓸 만할 뿐이다.’고 하였다. 중국의 식자(識者)가 본 것이 이미 이와 같은 바 돈같이 두꺼운 것이란 대개 자문(咨文)을 쓰는 종이이다.”104)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 지(紙).고 하여, 천하제일이었던 한지가 외교 문서에나 쓰는 돈처럼 두꺼운 것만을 생산하는 바람에 그림 그리기에 부적당하다고 지적하였다. 종이는 찢어지지 않아야 할뿐더러 먹을 잘 받아야 글씨 쓰기나 그림 그리기에 적당한데 당시 한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종이가 도전을 받은 것은 이러한 경우만이 아니었다. 박제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종이를 뜨는 발에 일정한 치수가 없어 책 종이를 절단할 때 이등분하면 너무 커서 나머지는 모두 끊어 버려야 하고, 삼등분하면 너무 짧아서 글자 밑이 없어지는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또 팔도 종이의 장단이 모두 같지 않아서 허비하는 종이가 얼마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종이가 반드시 서책에만 소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표준으로 하고 길이를 맞추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포백(布帛)의 넓이도 만이면 만이 다 다른데 베를 짜는 바디의 치수를 정하지 않은 까닭이니, 종이를 뜨는 발도 일정하게 규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종이에 대한 규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법전에 의하면 저 주지(楮注紙)는 길이 1척 6촌에 넓이 1척 4촌, 저상지(楮常紙)는 길이 1척 1촌에 넓이 1척을 규격으로 하고 이 이상을 넘으면 처벌한다고 하였다.105)『대전속록(大典續錄)』 권2, 호전(戶典), 잡령(雜令). 또 중국으로 보내는 외교 예물로 유명하였던 대호지나 소호지는 길이나 폭은 말할 것 없고 무게까지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앙에 상납하는 공물 종이의 규격이었던 것 같고, 시중에서 유통되는 종이에는 통일된 규격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제가는 종이에 일정한 기준이 없는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우리나라의 지물은 스스로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나, 실상은 쉽게 찢어지지 않을 뿐이다. 서적을 인출(印出)하거나 글씨를 쓰기에 좋지 못하며, 그림을 그리기에도 좋지 못하다. 이용감(利用監)에서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워 그리하여 본서(本署)에 알리고, 본서에서는 여러 도(道)에 반포함이 또한 마땅하다.”106)정약용(丁若庸), 『경세유표(經世遺表)』 권2, 동관공조(冬官工曹), 조지서(造紙署).라고 하였다. 이는 한지가 두껍기만 할 뿐 먹을 잘 받지 않아 서화용으로 부적합하다는 지적인데, 이유원도 『임하필기』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인용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 따르면, 중국의 한·삼국·남북조·수·당 때 군신(君臣)들의 진적(眞跡) 및 당나라 상·중·하인들의 진적 표지에 우리 종이를 사용하였다 한다.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우리 종이가 중국에서 매우 귀중한 명품으로 소문났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송나라 사람은 고려 종이를 천하제일로 여겼는데, 오늘날 우리 종이는 품질이 아주 열악해져 호남의 전주·남원·남평 것만이 나라 안에서 제일로 손꼽힐 따름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유명하였던 우리 종이가 겨우 전국 몇 곳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쇠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지도 결국 서양의 종이 앞에 무릎을 꿇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양의 기계화된 종이 생산 방법은 1888년 일본에서 먼저 도입하였고, 우리나라는 1901년(광무 5)에 일본 기술자를 초빙하여 용산 전환국(典圜局) 에 양지(洋紙) 제조소를 설치하면서 처음 들어왔다. 일본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우리가 거꾸로 일본에게 배우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지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1990년도까지 300개의 한지 공장에서 생산되던 국산 한지는 값싼 중국산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급격한 주거 환경의 변화도 한지가 사라지는 한 요인이다. 한옥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한지가 주종을 이루던 창호지와 장판지가 유리와 비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지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닥나무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닥나무를 수매하던 한지 공장이 사라지니 농가에서 더 이상 닥나무를 재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국산 닥나무 껍질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한지 공장에서는 값싼 동남아산 닥나무 껍질을 수입해 한지를 제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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