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3. 중국과 일본에 선물한 한지
  • 중국 명사의 애호품 한지
김덕진

한지는 여러 종류가 생산되어 국내에서 인쇄를 하거나 용품을 만드는 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국·일본 등지에는 오래전부터 명품 중의 명품으로 알려져 명사들이 아끼는 물품이었다.

한지는 닥나무와 닥풀을 원료로 하여 강도가 질기고, 맑은 물과 햇볕을 이용한 천연 표백 처리로 색깔이 희고,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여 표면이 매끄러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중국의 명망 있는 서예가나 화가들은 먹물을 잘 받고 붓놀림이 잘 되는 한지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송나라 사람들은 특히 고려 종이를 천하제일로 여겨 좋아하였다 한다. 고려 종이 가운데 견지(繭紙)는 송나라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그와 관련하여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송나라의 조희곡이 지은 『동천청록(洞天淸錄)』을 보니, 고려 종이는 면견(綿繭, 실제는 명주실이 아니라 닥나무로 만들었다)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가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며,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니 역시 진기한 명품이다.”107)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4, 만물문(萬物門), 견지(繭紙).라고 하였다. 고려 견지를 송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명품으로 꼽았던 사실은 이수광과 이규경 등도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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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먹
고려시대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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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송나라의 유명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은 고려 종이와 함께 먹을 극찬하였다. 송나라의 명사인 한구(韓駒)는 시를 지어 “왕경이 나에게 선물로 준 삼한지(三韓紙)라는 종이는 비계를 끊어 놓은 듯이 반질반질한 빛이 세상에까지 비치고, 전후가 또 나에게 보내온 조선묵(朝鮮墨)이라는 먹은, 칠 같은 검은 광채가 벼룻물 위에 빙빙 돈다.”108)이익, 『성호사설』 권4, 만물문, 조선묵(朝鮮墨).고 읊었다. 또한 서화가인 미불은 논서 1편과 잡서 10편을 고려 종이에 써서 장대형이라는 인사에게 주었는데, 이는 그의 득의(得意)에 찬 글씨였다 한다.

송나라에 이어 금나라의 명사들도 고려 종이를 애용하였다. 금나라 황제 장종은 푸른 물감을 들인 고려의 청자지에 글씨를 썼다. 고려의 청자지를 취지(翠紙) 또는 아청지(鴉靑紙)라고도 하는데, 송나라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아청지를 구하는 시를 지어서 고려 사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고려 청지는 명사들이 서화용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역사책을 편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는데, 명나라 때 『원사(元史)』의 책 표지를 청지로 만들었다 한다.

한지를 애용한 것은 명나라의 명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인인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조선 종이를 치켜세워 주었고, 문인이자 서화가인 서위(徐渭, 1521∼1593)는 조선 종이 가운데 돈같이 두꺼운 것을 심히 사랑하였으며, 문학가 종성(鍾惺, 1574∼1625)은 조선 종이에 당나라 문학가인 유신허(劉愼虛)의 시 14수를 썼다고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말한 바 있다.109)박지원,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 특히 조선 종이 가운데 죽엽지는 앞에서 이수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이 무렵 허균(許筠, 1569∼1618)이 지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의하면, 명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주태사(朱太史)가 허균에게 “조선의 붓은 천하제일이다.”고 하면서 무려 1,000자루나 구해 갔고, 아울러 조선 종이를 좋아하여 아주 엷은 것만을 가려 많이 가지며, “이것은 탑본(搨本)이나 모본(模本)하기에 좋다.”고 하였다.110)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藁)』 권24, 설부(說部)3. 한지는 서화 외에 탁본(拓本)에도 사용되었으니, 두꺼운 것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품질 좋은 얇은 것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지는 깨끗하고 매끄러워 중국 명사들이 글씨나 그림 또는 서책의 재료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긴 것이 요구되는 우산, 부채, 책 표지, 서화 배접 등에도 인기가 있었다. 한지가 중국에서 서적이나 서화의 장정용으로 사용된 것에 대하여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고려에서는 해마다 (중국에) 만지(蠻紙, 고려 종이)를 조공하는데, 서책을 장정하면 이것을 많이 쓴다. 명나라 의종의 서화 가운데 상등의 진적과 법서, 양한·삼국·이왕·육조·수·당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은 고려지로 맨 앞을 장정한다. 상등·중등·하등의 당나라 진적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 모사한 육조의 진적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 명나라 명화의 두루마리는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서유구도 『임원경제지』에서 「금화경독기」를 인용하여 동일하게 서술하였으니, 중국 명사들이 중요한 서책이나 서화의 표지로 한지를 적지 않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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