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3. 중국과 일본에 선물한 한지
  • 대중국 외교 예물 한지
김덕진

전통 시대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공식 관계는 사신(使臣) 왕래를 통해서 유지되었다. 그때 우리나라 사신은 예물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명품 선물을 가지고 중국에 갔고, 중국에서는 우리 사신 일행에게 답례의 의미로 역시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주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 사신을 통해 선물을 보내오면 우리도 역시 답례품을 보냈다.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형식은 이와 기본적으로 유사하였다. 이때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증여한 물품 가운데 종이가 상당한 양을 차지하였다.

멀리 일본에까지 종이나 서적을 전파한 고구려나 백제의 제지술, 그리고 1000년 이상 보존되는 종이를 개발한 신라의 제지술 수준은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이 중국에 외교 예물로 종이를 보낸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마 중국의 수준 높은 종이를 능가할 만한 제지술을 삼국이 아직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데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고려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중국인들이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종이를 제조하였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 예물에서 필수품으로 여겨졌고, 때에 따라서는 중국이 과도한 양을 요구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는 11세기 초에서 12세기 전반에 이르는 150여 년간 송나라와 친선 외교를 바탕으로 경제·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펼쳤다. 고려에서 파견된 사신은 외교 문서와 함께 진봉물(進奉物)이라는 외교 예물을 송나라에 바쳤는데, 거기에는 먹과 대량의 대지(大紙, 큰 폭의 종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고려 사신이 송나라 명사에게 개인적으로 헌납하는 것에도 붓, 먹과 함께 종이가 있었다. 이처럼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 황제나 명사들에게 바칠 만큼 명품이었고, 그것은 당시 정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 종이는 외교 예물로서만이 아니라 상품 교역물로도 중국에 전해졌다.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우리나라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 지금의 개성 부근)와 중국 양쯔 강(揚子江) 입구의 항저우(杭州)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정부에서 파견하는 사신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왕하는 상인과 승려도 참여하였다. 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으로 매우 번성하여 오는 배와 가는 배가 머리와 꼬리를 잇대고 있었다 한다.

고려에서 송나라로 수출한 상품은 금, 은, 동, 인삼, 책, 종이, 붓, 먹, 부채, 화문석 등이었다. 특히 종이, 붓, 먹은 송나라에서 인기가 높았다. 고려 종이는 아름답고 질겨서 필기를 하거나 서적이나 서화를 만들 때에도 많이 쓰였으며, 송나라의 유명한 종이보다 상품 가치가 높았다 한다. 그 때문에 고려 종이는 사신이나 상인이 잘 다니는 수도나 항구만이 아니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송나라는 자기 나라에 없는 서책을 대량으로 고려에서 전사(轉寫)해 가기도 하였는데, 1091년(선종 8)에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나라에서 돌아왔다. 송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서적에 좋은 판이 많다는 것을 듣고 관반(館伴)에게 명하여 구하려고 하는 서적의 목록을 적어 주면서 ‘책 차례에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베껴 써서라도 부쳐 보내라.’ 하였다.”111)『고려사절요』 권6, 선종 8년 6월.고 한 적이 있고, 이때 베껴 간 책이 125종 5,200여 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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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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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중국 동북 지방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등장하면서 고려는 이들 북방 국가와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지만, 곧 평화 관계로 전환하여 상당한 문물을 교류하였다. 바로 그때에 고려는 이들 나라에 종이와 필묵을 외교 예물로 제공하거나 상품으로 수출하였는데, 송나라에서 명성이 높았던 고려의 문방용품이 거란인이나 여진인에게도 여전히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일어나면서 고려의 대외 관계는 새롭게 펼쳐졌다. 1221년(고종 8)에 고려에 온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수달피 가죽 1만 장, 가는 명주 3,000필, 가는 모시 2,000필, 면자 1만 근, 용단먹 1,000자루, 붓 200필, 종이 10만 장, 자초 5근, 홍화·남순·주홍 각 50근, 자황·광칠·오동나무 기름 각 10근 등을 요구하였다.112)『고려사』 권22, 세가(世家)22, 고종 8년 8월 기미. 무리한 물품 요구 때문에 고려와 몽고 사이에 외교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종이를 10만 장이나 요 구한 것으로 보아 고려 종이의 우수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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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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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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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면서 매우 많은 물자를 요구하여 고려의 경제를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종이가 포함된 예를 살펴보면 1263년(원종 4)에는 고려 사신이 수달 가죽 500장, 명주 100필, 흰 모시 300필, 종이 1,500장(표지 500장, 주지 1,000장)을 원나라로 가져갔다.113)『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4년 4월 갑인. 북방 국가인 원나라는 추운 날씨 때문에 종이 생산이 불가능하여 고려에 많은 종이를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이 기술자를 데려다가 종이 공장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와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와도 병자호란 때문에 관계가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곧바로 친선 관계를 가져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매년 중국 국경일에 축하 사절(使節)을 파견하고(동지사·정조사·성절사·천추사), 필요할 때에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사은사·주청사·진하사·진위사·진향사 등). 중국에서도 조선에 칙사(勅使)라고 불리는 사신을 한 해에 한 번꼴로 보냈다. 그때마다 조공과 회사라는 이름으로 외교 선물이 오고 갔다.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많은 물품 중에는 종이도 있었다. 조선의 닥종이는 세폐 방물(歲幣方物) 또는 연례 공물(年例貢物)의 중요 품목으로 큰 비중 을 차지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서울이나 지방 각지에서 쓸 종이로 두툼하고 흰 빛을 내는 조선 종이를 제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우리 사신이 갈 때마다 보내는 종이가 다량으로 소요된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406년(태종 6)에 명나라 황제의 요청에 따라 순백지 8,000장을,114)『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6월 경술. 2년 후에 사신이 가는 길에 순백후지(純白厚紙) 6,000장을 각각 바친 적이 있다.115)『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11월 병진. 1419년(세종 원년)에 명나라 사신이 불경 인쇄용 종이 2만 장을 요구하자 순백후지 1만 8,000장과 순백차후지(純白次厚紙) 1,000장을 보냈다.116)『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2월 병술. 다시 이듬해에는 두꺼운 종이인 후지를 무려 3만 5,000장이나 보냈다.117)『세종실록』 권7, 세정 2년 1월 갑자.

16세기 명종대에 “자문지(咨文紙)는 만드는 공역이 매우 큽니다. 조지서에서 1년 중 봄과 가을 두 번에 만드는 종이의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진헌할 수량은 1,000장에 이르니 아마도 계속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군정(軍丁)을 더 모아서 따로 제조하고 또 지방으로 하여금 나눠서 제조하도록 한다면 그 폐 또한 클 것입니다.”118)『명종실록』 권5, 명종 2년 4월 기해.고 한 바와 같이, 명나라에 보낼 종이를 만드는 일을 조지서의 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군인을 추가로 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부담 지우기도 하였다.

이 밖에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인정 예물(人情禮物)’이라 하여 각종 종이를 선물하였고, 그들의 강요를 받아 제공하는 종이도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 왕래할 때 지나다니는 길 연변에 주재하는 관원도 종종 종이를 요구하였으므로 이에 응하여 지급하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보낸 종이도 매우 많았다. 남한산성에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할 때 세폐(歲幣, 새해 축하 인사로 주는 선물)로 가죽, 옷감 외에 대지(大紙) 1,000권, 소지(小紙) 1,500권 등 모두 2,500권의 종이를 매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119)『인조실록』 권34, 인조 15년 1월 무신. 하지만 세폐로 보내는 종이 수량은 갈수록 증가하여 매년 대지 2,000권과 소지 3,000권 등 5,000권을 보냈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2만 2,000냥, 쌀로 바꾸면 3,600섬이나 되었으니 참으로 막대한 분량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에 세폐 외에 방물(方物, 특산물을 보내는 것으로 흔히 공물이라고 한다)이라는 선물도 매년 사신이 가는 길에 보냈는데, 그 가운데 막대한 양의 백면지가 포함되어 있다. 1808년(순조 8)에 전사(傳寫)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방물로 보내는 백면지가 동지사·정조사는 각각 황제에게 1,300권, 태자에게 500권, 사은사·주청사는 황제에게 2,000권, 태자에게 500권, 진향사는 황제에게 5,000권, 태후에게 1,000권, 황후에게 1,000권으로 나타나 있다.120)『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5, 방물(方物). 이 밖에도 청나라 사신에게도 백지, 백면지, 장지, 유지라는 종이를 예단(禮單)이라는 이름의 예물로 적지 않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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