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3. 중국과 일본에 선물한 한지
  •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종이
김덕진

조선은 압록강, 두만강 연변에 거주하는 여진 여러 부족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였다. 이들 여진족은 말, 모피, 약재 등의 토산물을 조선에 바치고,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 종이, 농기구류 등을 답례품으로 받았다. 조선의 산물 중에서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종이를 비롯한 면포, 백저포, 쌀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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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부 지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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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이를 자주 조선에 요청하였다. 특히 장례용 종이를 빈번히 요구하였다. 여진족의 습속(習俗)에 장례를 치를 때 염을 한 후 관 밑에 까는 종이를 우리 것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은 그들 여러 부족을 회유하거나 귀순시키기 위해서 또는 각 부족의 추장 숫자나 부족의 성쇠나 위치 등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종종 종이를 지급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후지(厚紙)는 군수용(軍需用)으로 사용될 염려가 있어 지급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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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양가상묵과 신라무가상묵
신라양가상묵과 신라무가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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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국경 도시에서 개시(開市)와 후시(後市)라는 이름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이 성행하였다. 그 가운데 압록강 유역에 있으며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중강(中江) 개시에서 종이가 적지 않게 판매되었다. 한 해에 중강 개시에서 백지 8,400권, 장지 600권의 종이가 그들에게 팔린 적도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일본의 본토, 대마도, 유구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많은 종이를 보냈다. 삼국시대에는 책을 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논어』, 『천자문』 등의 유교 경전과 각종 불교 경전을 일본에 여러 차례 보냈는데, 그 서책의 종이는 백제 종이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도 7∼8세기에 이르면 독자적으로 종이를 생산하였을 것이지만, 부족한 양은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수입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쇼소인에는 새 깃털로 장식된 서 있는 여자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그 속에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가 남아 있다. 752년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일본 정부나 귀족 관인이 신라 상인에게서 구입할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종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쇼소인에는 신라에서 수입한 유기, 융단과 함께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 양가라는 집에서 만든 좋은 먹)’,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 신라 무가라는 집에서 만든 좋은 먹)’ 등의 문자가 새겨진 16㎝ 길이의 배 모양 먹 두 자루가 전해지고 있고, 『화엄경론』을 포장한 두루마리 종이가 소장되어 있다.

쇼소인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색마지(色麻紙) 종이, 물감 품은 종이, 그림 종이 등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이 종이를 당시 일본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도 있다. 이와는 달리 통일신라에서 제작한 것을 반입하였다고 주장하는 한국과 일본 학자도 적지 않은데, 이는 8세 기 당시에 일본이 종이에 색깔을 넣을 수 있는 색료를 만들 수 없었으며 색지에 그려진 봉황이나 기린 문양이 전형적인 신라 양식이라는 점을 토대로 내린 해석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신라에서 각종 문필구를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121)최재석, 『정창원(正倉院) 소장품과 통일신라』, 일지사, 1996 ; 이성시, 김창석 옮김,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청년사, 1999.

고려시대에 이르면 일본의 상류층은 고려에서 적지 않은 종이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일본의 『원씨물어(源氏物語)』에서는 주로 여성이 서사에 이용하기 위해 수입한 고려 종이가 엷고 결이 고운 편이면서 색은 화려하지 않으며 윤기가 있었다고 하였다.122)池田溫, 앞의 글, 199쪽. 같은 고려 종이라도 송나라에서는 두툼하고 질긴 것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에 비하여 일본의 궁정(宮廷) 여인들은 엷고 결이 고운 것을 선호한 듯하다.

조선은 일본 사신들로부터 토산품을 진상물로 받고 인삼, 가죽, 쌀, 직물, 부채 등과 더불어 종이를 회사품으로 지급하였다. 아울러 일본에 통신사·회례사·보빙사 등의 사신을 파견할 때에도 각종 물품과 함께 종이를 보냈다.

한편, 일본의 왕실이나 세력가가 사망할 때에도 위문품으로 여러 물건과 함께 적지 않은 종이를 보내기도 하였는데, 1426년(세종 8)에 대마도주 태수의 조모와 어머니의 상사에 쌀 100석, 콩 50석, 고운 흰 명주 10필, 고운 흰 모시 10필, 곶감 50첩, 잣 3석, 대추 2석, 밤 2석 외에 종이 200권을 보낸 적이 있다.123)『세종실록』 권31, 세종 8년 2월 병자. 외교상의 예물로 종이가 자주 이용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된 이후에도 한지는 일본에 다량으로 제공되었다. 일본 바쿠후(幕府) 쇼군(將軍)의 명을 받거나 대마도주의 필요에 의해 조선에 파견된 일본 사신을 차왜(差倭)라고 하였다. 가령 바쿠후 쇼군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외교 문서와 예물을 가지고 온 사신을 ‘관백고부차왜(關伯告訃差倭)’라고 하는데, 이 사신에게는 답례로 도화지 7권, 황국지·초주지 각 6권, 설화지 10권, 장지 35권, 백지 48권, 유지 53장 등을 주었다.124)김건서(金健瑞),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2, 차왜(差倭). 대규모의 일행을 거느리고 도쿄(東京)까지 들어가 문화 사절단으로 이름을 날린 통신사(通信使)가 갈 때에도 역시 종이를 가지고 갔다. 1763년에 조엄(趙曮) 일행은 백지 129속, 색지 30권 114속, 장지 36속의 막대한 양을 가지고 갔고, 1811년에 김이교(金履喬) 일행은 색지 37권과 장지 12권을 가지고 갔다.125)김덕진, 「1811년 통신사(通信使)의 사행비(使行費)와 호조의 부담」, 『역사와 경계』 55, 부산경남사학회, 2005 ; 김덕진, 「1763년 통신사 사행비의 규모와 그 의의』, 『전남사학』 25, 전남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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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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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선은 유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하고 일본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에 따라 유구의 사신이 외교 문서와 함께 선물을 가지고 부산을 거쳐 서울에 들어오면, 조선도 답례로 귀중품을 주었다. 그때 여러 물건과 함께 종이도 증여하였는데, 1467년(세조 13)에는 유구 국왕 앞으로 후지(厚紙) 10권, 책지(冊紙) 100권 외에 글씨를 쓸 수 있는 주석 연적 10개, 자석 연적 10개, 붓 200자루, 먹 100자루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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