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1. 일상 속의 옷감과 염료
  • 신분에 따른 옷감과 염료의 차이
김병인

우리는 세상에서 크게 출세하거나 성공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온 경우에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하고, 직장이나 전장 혹은 정치판에서 크고 작은 실수로 인하여 모든 직위를 버릴 때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 한다. 즉, 성공과 실패의 상황을 비단옷과 흰옷으로 구별한 셈인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옷감의 재질이나 색상을 일상에서 중요한 가치 기준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비단은 전통 옷감 가운데 가장 고급이며, 광택이 나고 구김이 잘 가지 않아 모양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비단, 즉 명주실은 누에의 고치를 풀어 실로 만든 것인데, 실의 단면이 삼각형 모양이어서 프리즘 효과를 내기 때문에 옷감이 무지갯빛을 내어 매우 아름답다. 비단은 예로부터 여름과 겨울철 옷감으로 두루 쓰였으며, 특히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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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혼례첩(回婚禮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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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통 시대에 서민들은 염색하지 않은 삼베나 모시 혹은 무명으로 만든 흰옷을 입었다. 특히 무명은 질기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여 주로 서 민들이 사계절 내내 즐겨 입었다. 무명옷은 색상이 투박한 데다가 신분이 낮은 사람이 입은 까닭에 흰옷, 즉 백의(白衣)는 서민이나 아직 벼슬하지 못하여 직위가 없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간다는 뜻의 백의종군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신라 헌안왕이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면서 왕족 응렴(膺廉)에게 “너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공부하였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는가?”라고 묻자, 응렴이 “저는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귀한 집 자제이면서 남과 사귐에 있어서는 자기를 먼저 하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집에 재물이 넉넉하여 사치스러운 옷을 입을 수 있는데도 항상 삼베와 모시옷으로 스스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일찍이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그 진실됨을 인정받아 국왕의 사위가 된 일화가 있다.128)『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11, 헌안왕 4년 9월.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麻衣太子)도 신라가 망하자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여기서 삼베옷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지조를 상징하고 있다(『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9년 10월). 여기에서 ‘삼베와 모시옷을 즐겨 입은 사람’을 예로 제시한 응렴의 대답이 흥미롭다. 삼베와 모시옷이 신라시대에는 가난과 청렴 혹은 결백의 상징처럼 여겨졌음을 알려 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신분과 계급 혹은 현실적 영욕에 따라 비단옷과 무명옷으로 달리 상징된 데에는 삼국시대 이래 실시된 공복(公服) 제도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신라에서는 법흥왕 때 공복을 색깔로 구분해서 관등(官等)에 따라 자색(紫色, 자주색), 비색(緋色, 비취색), 청색(靑色), 황색(黃色) 등 네 가지로 달리하여 입도록 하였다. 또한 백제에서는 고이왕 때에 자색, 비색, 청색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골품제(骨品制)에 따라 진골대등(眞骨大等)의 의복에 대한 금령(禁令)으로 “겉옷과 반비(半臂), 바지는 모두 계수금라(繼繡錦羅)를 금하였다. 허리띠는 연문백옥(硏文白玉)을 금하고, 목신발은 자주색 가죽을 금하고, 목신발 띠는 은문백옥(隱文白玉)을 금하며, 버선은 능(綾) 이하를 마음대로 쓰고, 신발은 가죽·실·삼(麻)을 마음대로 썼다. 포(布)는 26승 이하를 썼다.”는 기록이 전한다.129)『삼국사기』 권33, 잡지(雜志)2, 색복(色服). 이러한 금령은 6두품에도 별도로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의복의 색깔을 구분하여 관등에 따라 다르게 입도록 한 것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가 확립되고 왕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료 체제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고이왕은 정월 초하룻날에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 관을 쓰고, 흰 가죽 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보았다.130)『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28년 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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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 공주 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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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서곡리 고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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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옷감과 복색에 따른 신분과 계급의 구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834년(흥덕왕 9)에 신분에 따라 사용을 금지한 내용이 전하고 있는데, 심지어 남녀 속옷의 재질에 대해서까지 금지 사항이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남성의 경우 진골은 아무런 제한이 없었으나, 평민은 명주로 짠 견포만을 쓸 수 있도록 규정해 두었다. 발해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의복을 입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관리의 공복은 자주색, 비취색, 옅은 비취색, 녹색 등 네 가지 색으로 구분하였다. 발해의 지배 층이 고구려 유민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고구려의 공복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관리 공복 제도는 분명히 정해져 있었는데, 960년(광종 11)에 새로운 공복 제도가 제정되었다. 당시에는 관리를 네 부류로 나누어 각기 자주색, 붉은색, 비취색, 녹색으로 된 공복을 입도록 하였다. 이는 국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굳게 다져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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