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1. 일상 속의 옷감과 염료
  • 상전벽해와 청출어람
김병인

흔히 세월이 많이 흘러 자연 환경이 크게 바뀐 경우를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한다. 이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뜻으로 중국 진나라 때 도사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서 나온 말이다.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전통 시대에는 뽕나무 밭이 도처에 있었고, 뽕밭은 좀처럼 변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확대보기
신라 민정 문서
신라 민정 문서
팝업창 닫기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의 문서에 뽕나무의 그루 수를 기록해 둔 사례가 있다. 1933년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13매의 경질(經帙) 가운데 파손된 화엄경론(華嚴經論)의 책갑(冊匣)을 수리할 때 그 내부에 덧붙인 휴지 속에서 신라의 민정 문서(民政文書)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755년(경덕왕 14)이나 875년(헌강왕 1) 중 어느 한 해로 추정되고 있다.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모촌(某村)과 서원경에 근접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縣)의 관할 아래 있던 사해점촌(沙害漸村), 살하지촌(薩下知村), 모촌 등 모두 네 개 촌락의 명세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 민정 문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대민(對民) 지배 체제를 이해하고 백성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신라 정부는 촌민(村民) 지배를 위해 촌내의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치밀성을 보였다. 여기에는 네 개 촌의 문서가 모두 촌명(村名), 촌역(村域), 연(烟), 구(口), 우마(牛馬), 토지(土地), 수목(樹木), 호구의 감소, 우마의 감소, 수목의 감소 등의 차례로 일정한 기재 방식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뽕나무와 마전(麻田)의 존재이다. 마전은 합하여 1결(結) 9부(負)이다. 뽕나무는 모두 1,004그루였으며, 3년 동안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이다. 당시 신라의 촌 단위에 뽕나무가 1,000여 그루 있었고, 마전도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인들은 옷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하여 마을 단위별로 뽕나무와 마를 재배하였던 듯싶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에도 비슷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여러 고을의 옻나무ㆍ뽕나무ㆍ과목의 조수(條數) 및 저전(楮田)ㆍ완전(莞田)ㆍ전죽(箭竹)이 생산되는 곳은 장적(帳籍)을 작성하여 옻나무ㆍ뽕나무ㆍ과목(果木)은 3년마다 장적을 다시 작성한다.”고 법제화되어 있다.131)『경국대전(經國大典)』 권6, 공전(工典), 재식(裁植).

확대보기
양주목(楊州牧) 지도 중의 잠실 부분
양주목(楊州牧) 지도 중의 잠실 부분
팝업창 닫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옷감의 재배와 관련된 지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잠실(蠶室)은 본디 섬으로 양잠의 중심지였다. 잠실이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양잠업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국립 양잠소(養蠶所)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이곳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와 비슷한 유래의 지명으로 서초구에 있는 잠원동(蠶院洞)을 들 수 있다. 조선 초에 잠실도회가 이곳에 설치되어 잠실리라고 부르던 것을, 송파구 잠실동과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 자와 인근 신동면(新東面) 신원리(新院里)의 ‘원’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두 지역은 한강 가에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한강을 생업의 근간으로 하여 양잠을 한 가구가 많았다. 잠실은 1930년대만 해도 뽕나무가 무성하였고, 1945년 이후에는 채소밭으로 변하였다가 1971년 둑 아래 남쪽 방면의 물막이 공사로 인해 육지로 변하였다. 특히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지역의 개발로 뽕나무 밭은 사라지고, 현재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으니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저전동(紵田洞)이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모시밭이 많았다고 한다.132)『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토산(土産)에는 토산물로 모시(白苧)를 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저전동 일대에서 모시가 많이 재배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모시라는 특산물 재배 지역이 그대로 행정명으로 남게 된 사례이다. 이 밖에 전라남도 무안군의 옛 지명은 면주(綿州)였으며,133)『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무안현(務安縣), 군명(郡名). 경기도 장단군에는 면주동(綿紬洞)과 마전군(麻田郡)이 있었다.134)『신증동국여지승람』 권12,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산천(山川) 및 토산을 살펴보면 장단의 토산물에 삼(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면주동 옆 마을 영통동(靈通洞) 사람들은 포백을 빨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경상북도 안동군의 옛 지명은 능라(綾羅)였고,135)『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안동도호부(安東大都護府) 군명 및 풍속에는 “(안동은)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친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은 능성(綾城) 혹은 능주(綾州)라 불렀으며,136)『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화순현(和順縣) 건치연혁(建置沿革). 이와 관련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옛 화순현과 능성현의 토산에 뽕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전라북도 태인군에는 능향(綾鄕),137)『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태인현(泰仁縣), 고적(古跡). 태인현의 토산물에는 모시와 뽕나무가 포함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태인현 토산 및 『문헌비고』). 경상북도 문경군에는 견천(絹川)이라는 지명도 전한다.138)『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문경현(聞慶縣) 고적. 이처럼 옷감의 재료와 관련된 지명이 도처에 존재하는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의복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 주변에 옷감의 재료가 되는 나무를 많이 심고 재배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