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2. 옷감의 멋과 아름다움
  • 우리 옷감의 변천사
김병인

우리나라의 옷감 발달사를 알려 주는 최초의 문헌 자료는 『한서(漢書)』 「지리지」 연조(燕條)의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백성에게 예의, 전잠(田蠶), 직포(織布)를 가르쳐 주었다.”139)『한서(漢書)』 권28, 지리지(地理志), 연(燕).는 기록으로, 우리나라의 견직물 제직 역사가 적어도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 삵괭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 담비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 며,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140)『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 부여. 이 또한 우리나라의 의복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삼한(三韓)의 복식에 관해서는 “마한 사람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진한(辰韓)은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141)『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東夷傳)75, 한(韓). 이러한 마직물의 전통은 신라로 이어졌는데, 이는 “(신라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에 마땅하고, 뽕과 마가 많아 겸과 포로 된 옷을 지었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142)『남사(南史)』 권79, 열전,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의 기원을 설명하는 길쌈 대회의 기록처럼,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왕실에서 왕녀들로 하여금 삼베의 품질을 겨루는 대회를 열었으며, 남자들의 궁술 대회에서 삼베를 상품으로 주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시기부터 신라에서 삼베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라의 제직 기술과 의복 기술은 한층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당나라에 큰 꽃무늬 어아금(魚牙錦) 10필, 작은 꽃무늬 어아금 10필, 조하금(朝霞錦) 20필, 40승짜리 올 고운 흰 모직포(四十升白疊布) 40필, 30승짜리 모시 옷감(三十升紵衫緞) 40필 등 세밀하고 고급스러운 제직물을 진상한 데에서 알 수 있다.143)『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9년 7월. 한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비(首露王妃)가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가져온 물목 중에 금수능라(錦繡綾羅)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144)『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 미루어 보아 남방 직물 문화가 들어와 우리 복식 문화가 더욱 발전해 나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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