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2. 옷감의 멋과 아름다움
  • 우리 옷감의 종류
  • 면직물
김병인

면(綿)은 일찍이 인도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면직물은 무명, 광목, 옥양목이다. 우리의 옛 의복 규범에 흔히 “검박(儉朴)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적혀 있는 경우의 ‘검박’이란 ‘지나치지 않고 합당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검박한 옷감으로는 면직물이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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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綿)
무명(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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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면직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 1329∼1398)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원(翰苑)』의 고구려 기사에 “백첩포(白氎布)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첩포가 면직물의 다른 이름인 점을 감안한다면,153)백첩(白疊)은 면화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Pambak dip Pambak’의 한자 음역어(音譯語)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파리국(婆利國)의 남자는 고패포(古貝布)를 입는데, 섬세한 것은 백첩이라 하고 거친 것은 고패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패는 면직물의 옛 이름이고, 백첩은 중국인들이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면직물에 대해서 붙인 이름이다. 일찍부터 면직물을 사용하였음을 뜻한다. 또한 경문왕 때 40승 백첩포 40필을 당나라에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154)『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9년 추 7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문익점이 면 종자를 반입하기 이전에 면직물을 제직하여 사용하였다는 말인데, 그것이 자생인지 아니면 서역에서 들여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재래종 면화는 섬유가 섬세하며 섬유장이 길고 유연하여 품질은 좋으나 섬유의 양이 육지면(陸地綿)보다 적어 우리나라를 면 원료의 공급지로 삼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처지에서는 품종 개량이 불가피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생산된 원면(原綿)을 역직기로 제직한 다음 우리나라와 중국 지역을 판로(販路)로 삼았다. 면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광목과 옥양목이 대량 생산됨에 따라 우리나라 수직(手織) 무명의 제직은 점점 줄게 되어 근래에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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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짧은 섬유를 이어 실을 자아 베틀에서 짜낸 것이므로 표면이 갖가지 형태로 들고 나서 자동 직기로 짜낸 광목, 옥양목에 비하여 변화가 풍부하다. 게다가 섬유의 천성이 온화하고 화려하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 옷감에 적합하였으며 이불·요·베갯잇으로 시치거나 씌우면 광목, 옥양목보다 온화하고 푸근하였다. 무명은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의복을 만들 수 있는 재료로 수요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간혹 무명 표면의 변화를 선호하는 사람이 직물로만 쓰고 있는 실정이지만 무명이 옷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남성용 겹바지 또는 솜을 넣은 저고리, 조끼, 두루마기, 홑바지, 적삼과 여성용 치마, 저고리, 속바지, 단속곳, 두루마기의 감으로 널리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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