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2. 옷감의 멋과 아름다움
  • 우리 옷감의 종류
  • 모직물
김병인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시대의 유적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의 성성초(星星哨) 유적에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가린 평직(平織) 모직물이 발견되어 모직으로 만든 의복을 이른 시기부터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삼국지(三國志)』에 부여인들이 “출국할 때 비단옷, 수놓은 옷과 함께 모직옷(罽)을 즐겨 입었다.”는 내용을 보면156)『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 부여. 더욱 그러하다. 삼국시대에는 오늘날의 양탄자, 러그(rug)에 해당되는 제품으로서 신라의 구유(氍毹)와 백제의 탑등(毾㲪)이 제조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당나라와 일본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에서는 오늘날의 축융(縮絨) 양탄자에 해당하는 화전(花氈)을 제조하여 일본에 보냈는데, 지금까지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모직물은 여전히 애용된 것 같은데, 이는 모직을 다루는 공장(工匠)으로 보이는 모전(毛典)이라는 관직의 존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요나라에서 2,000마리의 양이 들어온 사실로 미루어 모직물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동국통감(東國通鑑)』 에 “1231년(고종 18) 최우가 연(輦)을 바쳤는데, 금은과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색(五色)의 전(氈, 모직물의 하나)으로 덮어서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므로, 왕이 감탄하여 칭찬해 마지아니하고, 제조를 감독하였던 대집성(大集成)에게 안마(鞍馬)ㆍ의복ㆍ홍정(紅鞓)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157)『동국통감(東國通鑑)』 고려기(高麗紀), 고종 18년(辛卯年) 8월. 당시 모직물을 이용한 사치가 심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최자(崔滋, 1188∼1260)가 삼도부(三都賦)에서 “공경(公卿)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쳤는데, …… 금벽(金碧)이 휘황하고 단청(丹靑)이 늘어섰으며, 비단으로 기둥을 싸고 채전(彩毯)으로 땅을 깔아 두었다.”고 읊은 것을 보면,158)『신증동국여지승람』 권12, 강화도호부(江華都戶府) 형승(形勝). 권세가의 집에서 양탄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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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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