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3.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염색의 종류와 변천
김병인

염료(染料)란 염색의 재료를 말하며, 여기에서 말하는 염색이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식물성·동물성·광물성 염료를 사용하여 섬유 등에 물들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조건이 동물 염료의 생육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식물 염료가 주로 발달하였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염색물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유물과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3세기에 쓰인 『삼국지』 및 1세기 후의 『후한서』 등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부여에서는 백의를 숭상하여 국내에서는 백포의를 착용하고, 출국할 때는 회수금계(繪繡錦罽)를 착용하였다.”고 전하며, 『후한서』에는 “마한에서는 금은금계(金銀錦罽)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부족 국가 시대에 이미 회(繪)·수(繡)·금(錦)의 염직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염색 방법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지만, 회는 그림 그린 옷감을 뜻하며, 수는 색사를 사용하여 무늬를 수놓은 직물이고, 금은 색사로 제직하여 문양을 구성한 직물을 의미하므로, 선염(先 染)과 묘염(描染)이 이미 발달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60)조경래, 『천연 염료와 염색』, 형설출판사, 2000, 225쪽.

날염법(捺染法)은 바탕 직물에 무늬를 그려 넣는 채희염과 무늬를 새긴 목판에 염액을 묻혀 무늬를 찍는 인화염이 있다. 『북사(北史)』에 “신라의 의복은 고구려ㆍ백제와 같은데, 신라 사람은 소견(素絹)에 그림을 잘 그렸다.”는 기록을 통하여 삼국 모두 채희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방염법(防染法)으로는 힐염을 들 수 있는데, 교힐ㆍ협힐ㆍ납힐의 세 종류가 있다. 교힐은 실로 직물을 묶은 다음 염액에 담가 부분적으로 염색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협힐은 문양을 새긴 두 조각의 판 사이에 직물을 끼워 넣어 염색하는 방법이고, 납힐은 직물에 납으로 무늬를 그려 염색한 후 납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침염법(浸染法)은 실이나 직물을 염액에 담가 같은 색으로 염색하는 방법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날염, 방염 방법이 이어져 왔으나 조선시대 후기부터는 대부분 침염만이 남게 되었다. 침염에는 치자·울금·소목 등과 같이 간단히 염색 재료를 끓인 염액에 천을 넣고 온도를 가하여 염색하는 일반적인 방법과 쪽·홍화·자초·감 염색과 같이 염색할 때 특별한 과정이 필요한 방법이 있다.

한편,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각 색상의 옷을 입은 생활 풍속도는 홍색·청색·황색·녹색의 염색 기술을 잘 알려 준다. 백제에서는 260년(고이왕 27)에 16품의 관위를 색 띠로 표시한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당시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실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라도 514년(법흥왕 1)에 품계에 따라 자색·비색·청색·황색의 옷을 입도록 하였으니, 지치·꼭두서니·쪽·울금 등의 염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무관 직제를 보면 색금(色衿)을 사용하여 직책을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에 색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색금이란 염색한 헝겊을 옷깃에 덧붙이는 것을 말한다. 홍색 계통은 비색·적색·자색으로 구별하였고, 청색 계통은 녹색·청색·벽색으로 구별하였으며, 흰색·검정색·황색도 사용하여 상당히 다양하게 색상을 표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염궁(染宮), 홍전(紅典) 등의 염색 관계 부서를 두어 전문적으로 염색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직물 생산과 염색이 관영 공업, 농촌 수공업, 사원 수공업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관영 공장에는 액정국(掖庭局)과 잡직서(雜職署)에 금장(錦匠), 나장(羅匠), 능장(綾匠), 견장(絹匠)이 있었다. 또한 어의(御衣)를 봉공(奉供)하기 위하여 수장(繡匠), 대장(帶匠), 복두장(幞頭匠) 등이 있었다. 또 도염서(都染署)를 두어 염색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장치서(掌治署)에는 금박장(金箔匠)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염색 방법은 대부분 침염을 사용하였으며 삼국 및 고려시대에 발달하였던 채희염, 힐염은 거의 사라지고 금박을 찍는 인금(印金)만이 남았다. 따라서 과거에 비하여 문직물(紋織物)의 생산은 감소되었으며, 무늬를 표현해야 될 경우에는 자수나 인금 혹은 간단한 직조로 시문(施紋)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백의를 입는 관습이 생겼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하여 백의를 숭상한 데서 온 것이라는 주장과 국상(國喪)이 잦은 가운데 백의를 입게 된 데서 생긴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첫째 염료를 구하기가 힘든 데다 값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복색에 대한 까다로운 금제(禁制)도 원인의 하나였다. 따라서 의례용 관복 등 특수한 것 이외에는 색옷을 입는 것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색 기술이 크게 발달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금제된 복색으로는 황색·자색·홍색·회색·백색·옥색 등이 있었다. 황색은 중국에서 ‘중지색 군지색(中之色君之色)’이라 하여 양반과 서민에게는 금지된 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덕여왕 이후 당나라 제도를 따르게 되자 일반인에게는 금지되었으나 왕에게는 사용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왕복은 황색이었다.

한편, 조선 태조는 개국 초에 모든 제도를 고려의 것을 따랐는데, 황색 은 군왕의 복색이었으므로 일반 남녀가 황색복을 입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태종 때에는 황색을 중국 황제의 복색으로 절대 신성시하여, 일반은 물론 왕에게까지 사용을 금하였다. 따라서 국왕의 복색은 황색을 피해 자색으로 정해졌다. 세종 때에는 황색에 가까운 토황색 또는 다갈색 옷까지 입는 것을 금지하였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자색과 홍색에 대한 금제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황색을 소위 중국 황제의 복색이라 하여 서민은 물론 국왕 자신도 이를 피하면서 자색을 왕색(王色)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