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4. 명품 옷감의 교역과 전파
김병인

우리 옷감의 교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견직물, 마직물, 피혁 및 금속 제품 등의 수공업도 성행하였다. 이 상품들은 인접 지역의 부족 집단에게 공급되었고, 대외 무역의 매개 수단으로도 널리 이용되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옷감과 직조 기술은 주로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일본의 『성씨록(姓氏錄)』에 “403년 127현의 백성을 성을 이끌고 내조, 귀화하여 금·은·옥·백(견직물)을 바쳤다. 인덕천황 시절에 진의 백성을 여러 군에 나누어 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게 하여 바치게 하였다. 천황이 이르기를 ‘진왕이 바치는 실·솜·견직물을 짐이 사용함에 부드럽고 따뜻하고 살갗 같기에 ‘하타(はた)’라는 성을 내린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사기(古事記)』에는 “백제가 탁소(卓素)라는 한인 공인(手人韓鍛)과 오복(吳服), 서소(西素) 두 사람을 바쳤다. 이들이 직기 제조의 조상이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 등을 전한 이후, 403년에는 백제에서 의복 만드는 사람(縫衣工女)을, 이듬해에는 기직인(機織人)을 도래(渡來)하게 하여 직기 제조와 기직 기술을 배운 사실을 가리킨다. 백제가 직조 기술자를 일본으로 보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직조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와 같은 우수한 직조 기술의 이면에는 양질의 옷감이 생산되었고, 아울러 염색 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백제는 일본 이외에도 송ㆍ제ㆍ양ㆍ진 등 중국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다. 당시 대중국 수출품은 해산물, 과하마(果下馬), 금갑조부(金甲雕斧) 등이 있었고, 수입품은 불전(佛典), 금포(錦袍), 채금(彩錦) 등이 있었다. 백제가 직조 기술과 옷감 생산력이 뛰어나기는 하였지만 채색된 비단만은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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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무용도
무용총 무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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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도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한 이후 중국과 일본 등을 상대로 하여 국신물(國信物) 교환 형태의 공무역을 전개하였다. 고구려가 옥저ㆍ읍루 등의 부족 국가를 통합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고대 국가를 형성한 것은 4세기 초 미천왕 무렵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귀족들의 사치품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위나라와 교역을 실시하였는데, 대중국 수출품은 황금, 백은, 말, 각궁(角弓), 짐승 가죽 등이었고, 수입품은 의관, 견직물, 무기류, 물소, 앵무새 등이었다.

한편,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인들은 남녀 관계없이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다. 이때의 저고리는 지린성 지안(集安)의 각저총과 무용총 벽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기장이 엉덩이에 이르도록 길고 깃을 왼쪽으로 여민 양식을 취하고 있다. 여자 복식의 기본형에는 저고리와 바지 외에 치마가 더해진다. 치마는 보통 치맛단에 저고리처럼 선을 덧댄 치마를 입었으나, 이 밖에도 허리에서 치맛단 끝까지 잔주름이 고르게 잡힌 주름치 마, 여러 색의 천을 잇대어 만든 색동치마 등 여러 가지로 멋을 낸 치마도 즐겨 입었다. 수산리 고분 벽화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의복은 복식 양식은 고구려 것이지만, 옷감과 색상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고급품일 것이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고구려는 비단을 생산하지 못한 까닭에 견직물을 많이 수입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귀족들이 화려한 의복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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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고분의 색동치마 입은 여인
수산리 고분의 색동치마 입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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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중국 무역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비교적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며, 주로 일본과 교역을 실시하였다. 당시 대일 공무역에서 옥, 견직물, 불상, 금은동철, 능라, 약재, 짐승 가죽 등을 수출하고 견, 면, 미농지, 선박 등을 수입하였다. 신라와 일본의 교역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양국은 서로 옷감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이는 그 분야의 생산력이 그만큼 원활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아울러 번성하였다. 당시 무역은 주로 바닷길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등저우(登州)에 이르는 바닷길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에 등저우에는 사절단이 유숙하고 상거래를 행하는 신라관(新羅館)과 신라방(新羅坊)이라는 거류지가 생겼으며, 이를 거점으로 대당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통일신라의 대당 수출품은 금, 은, 동, 침통, 세포, 견직물, 해표피, 장신구, 인삼, 말 등이었고, 수입품은 금은대, 포대, 금은 세공품, 약재, 서적 등이었다. 한편, 통일신라는 일본과도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을 행하였다. 당시 대일 무역의 수출품으로는 거울, 바늘, 주사(朱砂, 수은의 황화광물), 청목향(靑木香), 인삼, 병풍, 잣, 불상, 녹비(鹿皮) 등이 있었고, 수입품은 견, 면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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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묘의 신라 사신도
이현묘의 신라 사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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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접어들어 공ㆍ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대송 공무역은 962년(광종 13)부터 조공 형식의 사절단 무역으로 전개되었으며, 사무역은 관허 무역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송나라 상인들이 자국의 허가증을 휴대하고 와서 고려 조정에 그들의 토산품 등을 진헌하고, 그에 상당한 회사물(回賜物)을 받아 가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사절단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송상(宋商)의 도래 횟수가 많아지자 고려는 외국 상인의 숙박소 겸 상품 거래의 특허 장소인 영빈관ㆍ회선관 등의 객관을 설치하여 대송 사무역을 더욱 번창하게 하였다. 고려의 대송 공무역품으로는 금, 은, 인삼, 잣, 나전 세공품, 모시, 견직물, 말 등이 수출되었고, 비단, 자기, 보옥, 약재, 서적, 악기, 문방구, 용뇌(龍腦) 등이 수입되었다. 그리고 송상들은 사무역품으로 주로 고려 지배층의 수요품인 상아, 공작, 약재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인삼 또는 광포(廣布) 등과 교환하였다.

고려시대는 대송 무역 이외에 거란ㆍ여진ㆍ몽고ㆍ일본ㆍ대식국(大食國, 사라센 제국) 등과도 교역 관계를 맺었다. 거란과의 공무역은 현종 때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당시 거란은 수레, 관복, 요대, 견직물, 안구(鞍具), 은 기, 말 등을 보내왔다. 그리고 여진과의 공무역은 입공(入貢)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여진의 주요한 공물로는 말, 철갑, 번미(蕃米), 궁시(弓矢), 선박, 표피, 수달피, 낙타, 족제비 꼬리털 등이었고, 고려의 하사품은 은기, 식량, 철제 농기구, 무기 등이었다. 이후 몽고와의 무역은 조공 형식의 공무역 중심으로 행해졌는데, 고려에서 보낸 조공품은 금은 세공품, 호피, 수달피, 흰모시 등이었고, 원나라의 회사품은 귀금속, 견직물, 목면 등이었다. 또한 일본과의 공무역은 11세기 말엽 문종 때부터 일본의 요청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은 나전, 말안장, 벼룻집, 화병 등을 고려에 진공하였다. 이후 대일 공무역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진공품이 고려에게 그다지 필수 물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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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전경
송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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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시대의 대외 무역에서 이채로웠던 것은 대식국 상인과의 교역이라 할 수 있다. 대식국 상인은 당시 아시아와 유럽의 중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려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024년(현종 15) 9월이었다. 그들의 무역품은 주로 수은, 용치(龍齒), 몰약, 향료 등의 진귀한 남양 산물이었고, 고려에서는 그들에게 금백(金帛, 금과 비단) 등을 회사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대명 무역은 사절을 통한 공무역과 사절 일행의 사무역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절단을 통한 대명 공무역은 저마 직물류, 화문석류, 호피류, 나전 소함, 황모필, 인삼, 말 등을 수출하고, 견직물, 귀금속, 약재, 서적, 문방구 등을 수입하였다.

대청 공무역품은 찹쌀, 세포, 명주, 흰모시, 화문석, 종이, 수달피, 녹비 등이었고, 이에 대한 청나라의 답례품은 고급 주단, 모피, 견, 방사, 은, 약재, 서적 등이었다. 이후 1646년(인조 24) 압록강 하류의 중강(中江)에 개시(開市)가 개설된 이래, 중강에서 행하던 밀무역 시장인 중강 후시(中江後市)가 번성하다가, 숙종대부터는 청나라와의 밀무역 시장인 책문 후시(柵門後市)가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조선의 금, 인삼, 종이, 우피, 저포 등과 청나라의 비단, 당목, 약재, 보석, 서적 등이 교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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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 중 책문 부근
『해동지도』 중 책문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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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대일 무역은 사절을 통한 공무역 중심으로 행해졌는데, 조선 전기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사절을 파견하였으나 후기부터는 주로 대마도주가 일본국을 대표하여 세견선(歲遣船)을 보내옴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일 수출품은 면포, 인삼, 대장경, 미곡 등이었고, 수입품은 동, 유황, 소목, 후추, 금, 은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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