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5. 화폐와 선물로 쓴 명품 옷감
  • 명품 옷감의 화폐 기능
김병인

우리 역사상 옷감은 의복을 만들어 입은 것만이 아니라 화폐와 선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선 옷감의 화폐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살펴보자.

옷감은 초기 물물 교환 시대에 조개껍데기, 곡물과 함께 중요한 물품 화폐의 하나였다. 삼국시대에는 베·모시·비단 등의 견직물·마직물이 국가에 대한 세납과 지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민간 유통에 있어서도 쌀·조·보리 등의 곡물류와 함께 물품 화폐로 통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96년(성종 15) 철전이 주조된 이후 지속적으로 화폐 주조가 시도되었고, 일찍부터 중국에서 당나라 동전(唐錢)과 송나라 동전(宋錢) 등이 유입되어 물품 화폐 중심의 유통 질서를 극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시도하는 주전 정책은 쉽게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일반 유통계에서는 쌀과 베 등 물품 화폐와 금은 등 귀금속이 칭량(稱量) 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유통계를 지배하는 물품 화폐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베, 즉 포화(布貨) 역시 품질이 떨어져 유통 가치가 하락함으로써 물가의 등 귀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품질 나쁜 추포(麤布)의 화폐 기능이 둔화되자 유통계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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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복원품
포화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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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당시까지 지배적 유통 질서인 물품 화폐 유통 체제를 극복하고 명목 화폐 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저화(楮貨)와 동전의 유통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에 베(布貨)를 법화(法貨)로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반 백성들이 실용 가치가 높은 베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을 더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저화를 가지고 민간이 보유한 금·은·목면(木棉)을 매입하여 저화의 구매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보유한 쌀을 방출하여 저화를 환수함으로써 저화의 공신력 내지 태환력(兌換力)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이 추포를 계속 화폐로 통용하며 저화의 사용을 기피하자, 한양과 지방에서 베의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하면 엄격히 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물품 화폐인 베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방법으로 저화의 유통력을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저화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게 되어 저화는 사라지고 일반 백성은 베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에 저화가 포화와 함께 법화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정부에서는 추포와 같은 물품 화폐의 통용을 금지하거나 칭량 은화의 사용을 억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동전의 유통 영역을 확대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에는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개성, 중국과 인접하여 국제 무역이 발달한 의주·안주·평양 등지에서도 동전이 통용되었고, 상평통보가 법화로 채택된 후부터 화폐 경제의 확대 추세가 뚜렷해졌다. 그리고 17세기 말 명목 화폐인 동전이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 유통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베는 역사상 일찍부터 물품 화폐로 통용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 화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포화는 우리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였고, 일본 등 외국과 교역의 결제 수단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비단이 이처럼 중요한 화폐 수단의 위상을 지닌 까닭에 지나친 사치는 국가에서 규제하기도 하였다. 신라 애장왕 때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는 교서(敎書)를 내린 바 있다.161)『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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