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4장 만병통치약, 인삼
  • 3. 해외로 뻗어 나간 인삼의 길
  •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
  • 은화의 순도 하락과 인삼 무역 시장의 교란
정성일

조선·일본·중국은 근대 이전에 이미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동아시아 삼국은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필요한 재화를 서로 교환하는 무역 체제를 확립해 놓고 있었다.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7∼18세기를 통하여 세 나라를 대표하는 상품은 인삼(조선)·은(일본)·비단(중국)이었다. 즉, 각국을 대표하는 상품의 조달 여부가 이 지역 무역의 성쇠를 결정짓는 열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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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시종각서(人蔘始終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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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인삼과 은의 교환이 상당 기간 동안 양국의 무역의 중심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의 뛰어난 연구를 바탕으로 소개하고자 한다.233)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일본의 정은(丁銀)은 대부분 원형 그대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유입되고 있었다.234)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러 들어온 모든 은화(銀貨)가 일본에서 주조된 원형 그대로 전량 중국 시장으로 유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순도가 높은 은을 선호한 탓에 조선 상인들이 일본 은화를 조선 국내에서 녹여서 순도가 높은 은을 만들어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은의 품위가 1695년(숙종 21)에 크게 낮아지게 되어 무역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도쿠가와(德川) 바쿠후는 정권 장악 이후 100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은의 순 도를 바꾸지 않았다. 순도 80%라고 하는 비교적 높은 품위의 은이 동아시아 시장에서 교환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은화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가 높았다. 그래서 일본 은화의 교역로를 가리켜 ‘은의 길(Silver Road)’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경장은(慶長銀)이 사라지고 순도가 64%로 떨어진 새로운 은의 등장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가치가 크게 하락한 원록은(元祿銀)을 갑작스레 무역용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중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의 대마도는 잠시 동안 일본의 은화 개주(改鑄) 사실을 조선에 알리지 않고 숨겼다. 그렇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양화인 경장은은 점차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대마도로서도 이제는 은화의 개주 사실을 조선 측에 고백하고, 악화인 원록은의 수출을 인정받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원록은이 나온 지 2년 뒤인 1697년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쉽게 결판이 날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이 처음 발생한 터라 조선 측에서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도 화폐 개혁이 있을 때면 신권과 구권의 교환 비율이 가장 중요하듯이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신은(新銀)인 원록은과 구은(舊銀)인 경장은을 어떤 비율로 교환할 것인지가 최대 관건이었다. 지루한 교섭 끝에 양국은 1698년이 되어서야 일본 측이 신은을 통용시킬 때 전보다 27%를 더 지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은화는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사용되는 것이어서 무엇보다도 시장의 신뢰가 중요하였다. 시장 참가자들은 일본(대마도)의 간사한 계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일본 측에 문서로 이를 확증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는 수 없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요시자네(義眞)는 “원록은을 향후 교역 은(銀)으로서 삼고자 한다.”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작 성하여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앞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1700년부터 원록은이 무역 결제 수단으로서 정식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교역은의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1706년 일본 정부는 또다시 은의 품위가 50%인 악주(惡鑄)를 단행하였다. 1710년 3월에는 순도가 40%로, 같은 해 4월에는 32%로 순도가 더욱 떨어졌다. 심지어 1711년에는 순도 20%의 은화가 발행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한 개의 은화에 함유된 것이 은 20%, 구리 80%라고 하니, 과연 이것을 은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화폐 발행 이익을 늘려서 재정 수입을 확보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국제 시장에서 일본 은화에 대한 신인도(信認度)가 추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곧바로 무역의 쇠퇴를 가져오게 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대마도는 악주를 되풀이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각료에게 조선과의 무역이 몹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음을 호소하고, 조선 측이 받아 줄 만한 양질의 은을 일본 정부가 대마도에 제공해 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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