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5장 우리 먹을거리의 명품, 김치
  • 1. 김치의 역사
  • 영·정조대의 김치
김경옥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김치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명칭과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김치에 대한 용어를 문헌에서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사헌 이명언(李明彦)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 산릉(山陵)의 역사(役事)는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제전(祭奠) 때 쓰이는 것은 침채(沈菜)·생채(生菜)·진과(眞瓜)·서과(西瓜) 등 서너 종류에 지나지 않는데,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부역은 여러 고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248)『영조실록』 권1, 영조 원년 9월 갑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만수(李晩秀)가 올린 별단(別單)의 여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락국의 왕릉이 김해부의 서쪽 2리쯤 되는 평야에 있는데, …… 제물(祭物)은 한결같이 본릉(本陵)의 동지(冬至) 제사의 전례대로 장만하라 하였습니다. 벼·기장·개암·밤·희생·포·김치(菹)·젓갈 따위는 대략 숭덕전(崇德殿)의 제물과 같습니다.249)『정조실록』 권34, 정조 16년 4월 을사.

앞의 사료를 보면 영조와 정조 때에는 김치를 ‘저(菹)’ 또는 ‘침채(沈菜)’라 표기하였고, 여전히 제사 음식으로 진설하고 있다. 또 김치 조리 방법도 조선 전기와 동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김치는 채소에 소금을 뿌려서 만들거나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서 만들었으며, 다양한 채소를 재료로 이용하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물성 향신료와 동물성 부재료를 첨가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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