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5장 우리 먹을거리의 명품, 김치
  • 1. 김치의 역사
  • ‘수수보리지’와 ‘통관 집’의 김치
김경옥

일본에서 채소 절임은 저장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소금을 많이 넣었다. 중국의 채소 절임 역시 일본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채소 절임은 고춧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처럼 소금을 많이 넣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삼국은 채소를 소금에 절여서 식용하였지만, 채소에 들어가는 소금의 양에 따라 김치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였다.

일본에서는 김치 무리를 ‘지(漬)’ 혹은 ‘지물(漬物)’이라고 한다. 일본 김치의 형태는 채소 보존을 목적으로 많은 양의 소금을 넣지만, 김치 국물은 만들지 않는다. 일본의 김치 종류는 소금을 넣어서 발효시킨 김치, 술지게미·곡물·느릅나무 껍질 가루에 채소와 소금을 넣어서 절인 김치, 초절이, 장절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곡물에 채소를 절이는 것을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라고 한다. 여기에서 ‘수수보리’란 일본에 술 만드는 방법을 전달한 백제 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후 수수보리지가 일본의 대표적인 김치인 ‘다쿠앙(澤庵)’이라 불리는 ‘단무지’로 발전한 것이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수수보리지는 곡물 가루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처럼 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곡물 가루는 김치를 쉽게 산패(酸敗)시켰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곡물 대신 쌀겨를 이용하여 일본식 김치를 만들었다.252)이성우, 앞의 책, 429∼430쪽. 즉, 일본 김치는 백제 때 일본으로 전래된 수수보리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고대 이래로 중국인들은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식초에 담가서 김치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김치 맛은 콧등을 찌푸리면서 먹을 만큼 신맛이 강하였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면 우리나라 김치가 중국에 전래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에 대해서는 1712년(숙종 38) 청나라에 다녀온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만든 동치미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1804년(순조 4)에 편찬된 『계산기정(薊山紀程)』에도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18세기에 중국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의 김치가 어떤 종류, 어떤 형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치가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김치라는 용어는 동북아시아 삼국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고대의 김치는 ‘저(菹)’라 표기하여 ‘채소를 (소금에) 절인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청나라 때 김치 ‘함채(鹹菜)’ 역시 ‘짠 나물’, ‘소금에 절인 푸성귀’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김치를 ‘지물(漬物)’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다’, ‘적시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김치를 ‘지(漬)’라 하고, 김치 담그는 것을 ‘염지(鹽漬)’라 하였으며, 달래김치·무김치·미나리김치·죽순김치 등은 제사 음식으로 진설하였다. 그리고 김치는 조선 세종 때 ‘저(菹)라 표기하였고, 17세기에 ‘침채(沈菜)’, 18세기에 ‘침저(沈菹)’, 19세기에 ‘장채(藏菜)’, ‘황제(黃虀)’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남부 지방에서는 김치를 ‘지(漬)’ 혹은 ‘짠지’라 일컫고 있다. 이렇듯 동북아시아 삼국에서 김치의 의미로 쓰는 용어는 ‘채소를 소금물에 절이다.’ 또는 ‘채소를 물에 담그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김치란 ‘소금에 절인 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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