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5장 우리 먹을거리의 명품, 김치
  • 4. 김치를 통해 본 의례와 문화
  • 군자의 집에 보낸 침채
김경옥

전통 시대 아침저녁의 식사는 밥 아니면 죽이었다. 남녀가 식탁에 둘러앉아 작은 그릇으로 나누어 먹는데, 한 그릇을 다 먹으면 다시 한 그릇을 더 먹곤 하여 양대로 먹었다. 이러한 음식의 편미(偏味)를 네댓 차례 삼키고 나면 반드시 가슴에 엉기어 즉시 소화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밥에 염채와 침채를 곁들여서 밥맛의 단순함을 조화시키면, 엉켰던 것이 환연히 내려가니 그 조화의 처방이 이 때문에 생겨났다.266)최한기(崔漢綺), 『기측체의(氣測體義)』, 신기통 2.

가난한 집의 평소 반찬은 김치 하나가 전부였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김치 담그는 일을 집안일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어쩌다 맛있는 김치라도 생기면 혼자만 맛보기 아쉬워 이웃, 친지, 친구와 나누어 먹었 다. 그런가 하면 제사 음식에도 반드시 김치를 진설하였고, 혼례를 올리는 신랑 신부의 초례상 설찬도(醮禮床設饌圖)에도 김치가 빠지지 않았으며, 연말연시에 공경하는 어르신께 선물로 드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앙 관료들이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김치를 선물하였는데, 이 때문에 ‘침채 정승(沈菜政丞)’, ‘침채 판서(沈菜判書)’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고문서, 그리고 개인의 문집과 일기에서 확인된다. 유순(柳洵, 1441∼1517)의 오언고시(五言古詩)에서는 맛있는 김치를 나누어 먹으며 앞날을 도모하는 선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267)유순(柳洵), 『동문선(東文選)』 속(續)3, 「부산개침채기이수(賦山芥沈菜寄耳叟)」.

하늘이 이 조그만 물건을 냈는데

타고난 성질이 홀로 이상하여

저 벌판과 진펄을 싫어하고

높은 산 언덕 위에 뿌리를 박네

봄철에 퍼지는 보통 풀을 시시하게 여겨

눈 속에서야 싹이 돋아나네

가는 줄기가 한 치도 못 되니

어데 있는지 찾기도 어려워라

이따금 산중의 중들이

도망자를 잡듯이 뜯어다가

세상에 내다가 파는 것을

곡식과 함께 사오누나

날로 씹으니 어찌나 매운지

산방에서 전하는 묘법에 따라

끊는 물에 데쳐 김치를 만드니

금시 기특한 향내를 발하네

한 번 맛보자 눈썹을 찡그리고

두 번 씹자 눈물이 글썽

맵고도 달콤한 그 맛은

계피와 생강을 깔보니

산짐승, 물고기의 맛

온갖 진미가 겨룰 수 없네

내 식성이 괴벽한 것을 즐겨

매양 이를 만나면 미칠 듯 좋아하니

어머니께서 그런 줄을 아시고

은근히 한 광주리를 부치셨네

꿇어앉아 그 충정에 감격하니

봄빛 은혜를 어이 갚을꼬

이 마음 그대에게 알리고 싶고

이 맛을 나 혼자 맛보기 어려워

조그만 함 속에 담아

군자의 집으로 보내 드리노니

바라건대, 그 즙을 마시면서

함께 세한의 방향을 보전하세.

“이 맛을 나 혼자 맛보기 어려워 조그만 함 속에 담아 군자의 집으로 보내 드리노니”라는 대목에서 저자가 고추를 듬뿍 넣어 만든 김치를 가까운 지인에게 나누어 주며 감사하는 마음과 상대편에 대한 애정과 관심 표현 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김치는 조선시대 관료들에게 뇌물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될 만큼 위상이 매우 높았다. 다음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용어가 ‘잡채 상서(雜菜尙書)’, ‘침채 정승’이다.

무신년(1608) 이후로 큰 옥사(獄事)가 해마다 일어났는데, 집안을 일으키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고변(告變)을 하거나 내통(內通)하는 방법을 쓴 자들이었다. …… 이런 길을 통하지 않은 자는 모두 험난한 지경에 떨어지고 심한 경우에는 죄를 얻어 법망에 걸렸다. ……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임금과 가까운 간인(奸人)에게 빌붙어 못 할 짓이 없이 날뛰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잡채 상서니 침채 정승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는데, 이는 대체로 잡채나 침채 등을 바쳐서 왕의 총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268)신흠(申欽), 『상촌집(象村集)』 권52, 춘성록(春城錄).

이 글은 광해군 때 정치의 문란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것은 17세기 초엽의 정치와 사회상을 언급하면서 등장하는 용어가 ‘잡채’와 ‘침채’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17세기의 잡채와 침채는 임금의 총애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명품으로 이미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추이는 19세기 초엽에 간행된 고문헌에서도 쉽게 확인되는데, 바로 ‘침채 판서’, ‘잡채 참판’ 등의 용어가 그것이다.269)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21권, 폐주광해군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즉, 17세기에 간행된 자료에서 침채 정승이었던 용어가 19세기에는 침채 판서 등으로 관직명만 조금 변화되었을 뿐이다. 이렇듯 김치는 평상시 밥상에 꼭 올리는 유일한 반찬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맛보는 흔한 음식이기도 하지만 밥상에 서 없어서는 안 될 식품이기도 하였다. 19세기에 김치의 상징성과 품격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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