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
  • 2. 모피의 용도와 사회
  • 한여름의 모피 패션
윤재운

발해 사절단이 일본에 가져간 물품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은 담비가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모피였다. 그것도 당시 일본에서는 값이 매우 비싼 담비, 호랑이, 말곰(羆) 따위의 모피를 대량으로 가져가 일본 지배층을 놀라게 하였다.

발해 사절단은 모두 34차례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대량의 모피를 가지고 갔다. 발해 사절단이 많은 양의 모피를 배에 싣고 갔다고는 하더라도 모피의 양에는 한도가 있어 궁정(宮廷) 귀족 사회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손에 넣기 어려운 모피를 구해 입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분 상징이 되어 귀족들이 갈망하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연애와 놀이를 일상사로 하였던 헤이안시대(平安時代) 귀족이 여성을 사로잡기 위해 앞 다투어 모피를 구하여 바쳤다는 것은 『다케도리 이야기(竹取物語)』 속에 나오는 아가씨가 사내들에 대한 주문의 하나로 ‘쥐가죽 옷’을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번객(蕃客)이 가져오는 물품을 사사로이 교환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겠다. 그러나 이즈음 사람들은 반드시 외국산 물품을 좋아하여 다투어 무역하고 있다. 마땅히 엄하게 금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어야겠다.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 백성은 곤장 100대로 정한다. 왕신가(王臣家, 권력 가문)에서 사람을 시켜 매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국사(國司, 일본의 지방 관리) 가운데 아부함을 허용하는 자 또는 스스로 사들이는 것은 특히 중벌로 다스리니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276)『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 권19, 금제사(禁制事).

이 기록을 보면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모피의 인기가 높아 그들이 앞 다투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지고 싶었던 모피를 손에 넣은 귀족들은 그것을 신분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입고 패션을 경쟁하였다.

모피에 대한 패션 경쟁을 말해 주는 예로 919년에 발해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를 들 수 있다. 이듬해 5월 12일에 열린 풍락전(豊樂殿)의 연회석에 사절단의 대표인 대사(大使) 배구(裵璆)는 가죽 옷을 입고 참석하였는데, 일본 왕은 검은 담비가죽 옷 여덟 벌을 겹쳐 입고 참석하여 배구를 비롯한 발해 사절단을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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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성첩(中臺省牒)
중대성첩(中臺省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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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5월 12일은 양력 6월 7일에 해당하는 무더운 계절이었다. 더위를 참고 가죽 옷을 입은 배구 일행을 놀라게 할 만큼 일본 지배층 사이에서는 과도한 모피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일화이다.

일본 정부에서도 과도한 모피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피 금지령’을 내린 듯하며, 다음과 같이 모피 사용 기준을 정하여 규제하였다.

-5위 이상은 호랑이가죽을 사용할 것을 허락한다. 단 표범가죽은 참의(參議) 이상과 참의가 아닌 3위에 허용한다. 이 밖에는 허용할 수 없다.

-담비가죽 옷은 참의 이상에게 착용을 허락한다.

-말곰가죽으로 만든 장니(障泥, 말다래)277)말을 탄 이의 옷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으로 만들어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물건이다.는 5위 이상에게 착용을 허용한다.278)『연희식(延喜式)』

요컨대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5급 혹은 3급 이상의 고위 관리가 아니면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 사절단이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금지령이 풀려 자유롭게 모피를 착용할 수 있었다.

발해의 객(客)을 대접하기 위하여 제사(諸司), 관원, 잡인(雜人) 등 객인(客人)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사용이 금지된 물품을 몸에 지니는 것을 허용한다.279)『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권43, 원경(元慶) 7년 4월 21일 정사.

이것은 먼 곳에서 모피를 운반하여 온 손님에 대한 일본 측의 배려라고 할 만한 조치였는데, 모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앞에서 소개한 일화처럼 패션 경쟁을 벌였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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