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
  • 2. 모피의 용도와 사회
  • 명품으로서의 모피
윤재운

고조선의 모피물에 관한 기록으로는 『관자(管子)』를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에서 나는 표범가죽이 중국에서 금(金)과 같이 통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제(齊)나라에서 고조선의 표범가죽을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비싼 값으로 무역하였던 것을 보여 준다.

부여의 모피물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지』,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한원(翰苑)』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부여에서는 소 기르기를 좋아하였고 좋은 말을 산출하였으며 목축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적옥(赤玉)·대주(大珠)·미주(美珠) 등의 구슬 종류와 담비(貂)·눌(豽, 원숭이의 일종)·유(貁, 긴 꼬리 원숭이로 족제비의 일종) 등 많은 모피물을 생산하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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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는 동해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을 주로 어업에 의지하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맥포(貊布)를 조세로 냈고 소와 말이 적었다고 한다. 이어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조세로 담비, 포(布), 물고기, 소금과 해산물을 고구려에 바쳤음이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담비가 옥저의 특산물임을 알 수 있다.

동예(東濊)는 『삼국지』에 의하면, “바다표범가죽(海豹皮)이 산출되었으며 과하마(果下馬)가 나서 한나라에 항시(恒時)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에는 “동예인들이 가죽신을 신고, 가죽을 입고 소와 돼지를 목축하기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동예 사람들의 의생활은 모피물이 주된 것이었으며 이에 따른 모피 가공 기술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토모(土毛)가 특산품으로 생산되었으며 이를 중국에 보냈던 것이 『위서』와 『북사』에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가 말 3만 필과 소 5만 두를 말갈에게서 노략(擄掠)한 사실로 볼 때 말과 소가 주변 국가에서 많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 말 800필을 중국에 보낸 『남사(南史)』의 기록과 숙신(肅愼)에서 여우가죽, 흰 매, 흰 새를 고 구려에 바친 『삼국사기』의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주변 국가와 교류가 성행하였으며 아울러 모피물도 교류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는 수류지(須流枳)와 노류지(奴流枳)라는 혁공(革工)을 493년(문자왕 2)에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일본 박량부(狛梁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승무량(勝武梁)이 일본에 가서 사슴가죽과 소가죽을 염색하여 갑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백제의 모피물 사용은 『삼국사기』에 고이왕이 정월에 흰 가죽띠(素皮帶), 검은 가죽신(烏韋履)을 착용하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본 기록으로 나타나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도 왕이 흰 가죽띠와 검은 가죽신을 착용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북사』와 『주서』에는 백제에 없는 동물로 낙타(駝)·당나귀(驢)·노새(騾)·양(羊)·거위(鵝)·오리(鴨)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낙타 1필, 당나귀 1필, 양 2두, 흰 꿩을, 『일본기략(日本紀略)』에는 고력양(羖䍽羊, 염소의 일종) 2두, 백양(白羊) 4두, 산양(山羊) 41두, 거위(鵞) 1쌍을 백제에서 일본에 보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 나지 않은 품목은 중개 무역을 통해 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869년(경문왕 9)에 당나라에 보낸 물품 가운데, 매를 수놓은 붉은 가죽(繫鷹緋纈皮) 100쌍과 새매를 수놓은 붉은 가죽(繫鷂子緋纈皮) 100쌍을 보낸 기록이281)『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9년. 있어 신라에서 가죽에 염색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복식 금제에 기록된 자색 가죽, 주름진 검은 사슴가죽과 자색 가죽(烏麋皺文紫皮)과 함께 신라의 가죽 염색과 가공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신라에는 모전(毛典)·피전(皮典)·피타전(皮打典)·탑전(鞜典)·화전(靴典)·추전(鞦典)282)『삼국사기』 권39, 지8, 직관(職官). 등의 수공업 관청에서 모피물을 염색 가공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뿔 사슴(角鹿), 흰 사슴(白鹿), 흰 여우(白狐)를 왕에게 바치는 기록이 있어 그것들이 신라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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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 전경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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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년(성덕왕 22)에는 당나라에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우황·인삼과 함께 과하마 1필과 바다표범가죽을 보냈고, 734년(성덕왕 33)에는 조랑말 2필, 개 3마리, 두발 100량(兩), 바다표범가죽 16장을 보냈다.283)『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22년·32년. 이를 통해 다른 상품들과 함께 모피물도 중국에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10∼912)는 『제도로(諸道路) 및 제왕국지(諸王國志)』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황금의 산출 및 그곳 왕래에 관해 서술한 다음 신라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반출해 가는 물품 가운데 담비가죽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담비가죽이 아랍에까지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외국과 교류가 많았던 발해는 모피도 수출하였다. 727년(무왕 9)에 담비가죽 300장, 739년(문왕 4)에 대충피(大蟲皮, 호랑이가죽으로 추정됨) 7장, 곰가죽 7장, 담비가죽 6장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은 그 값의 몇 십 배나 되는 시(絁), 사(絲), 면(綿), 포(布) 등을 발해에 보내왔다.284)『속일본기(續日本紀)』 권10, 신구(神龜) 5년 정월 갑인. 872년(선왕 10) 에는 범가죽 7장, 표범가죽 6장, 곰가죽 7장 등을 일본에 보냈다.285)『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권21, 정관(貞觀) 14년 5월 18일 정해.

발해의 물산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죽도 있다. 집짐승으로는 돼지·말·소·양 등을 많이 길렀는데, 막힐부(鄚頡府)286)그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아청현(阿城縣)과 우창현(五常縣), 지린성(吉林省)의 창춘(長春)과 눙안(農安) 등 여러 설이 있다. 의 돼지가 유명하였다. 발해 집짐승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가 양이었다. 938년 발해의 후신인 동단국(東丹國)이 양 3만 마리를 남중국에 있던 남당(南唐)에 수출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발해가 당시에도 아주 많은 양을 기르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중국에서 요·5대 10국·송·금·원·명이 건국되는 시대적 배경 아래 각종 무역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모피물이 고려의 특산물로 묘사되었다.

『고려사』 등을 보면 소가죽·말가죽·호랑이가죽·담비가죽·곰가죽·양가죽·표범가죽·수달가죽·고양이가죽·쥐가죽·청쥐가죽 등 각종 모피물과 구(裘)·모관(毛冠) 등 가공된 모피물, 그 밖에 모직물·모제품이 복식과 생활용품에 사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외국으로 수출된 모피물은 이리가죽·오소리가죽·들고양이가죽·황색고양이가죽·고라니가죽·담비가죽·수달피·호랑이가죽·표범가죽·곰가죽·염소가죽 등이었고, 동물로는 소·말·백마·노새 등이어서 종류가 다양하였다.

외국에서 고려로 보내온 모피물은 표범가죽·소가죽·담비가죽·수달피·호랑이가죽·쥐가죽 등이 있으며, 동물로는 말·양·물소·낙타가 있다.

지금까지 고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에 걸친 모피물의 교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모피물이 생산되었고, 이것이 증여나 교역을 통해 중국·일본 등지로 전해져 명품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그 가공 기술 또한 외국으로 전해졌음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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