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
  • 5. 우리 문화 속의 말
  • 해외로 건너간 우리나라 말
윤재운

말은 국제적으로도 이동되고 있었다. 즉, 말은 조공(朝貢)의 헌상품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공은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국제 교역 내지는 국제 교류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고대에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보낸 말은 거의 과하마였다. 과하마는 체고가 3척 정도로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체구가 작은 말은 등반력(登攀力)이 강해서 산악 지대의 교통수단으로 알맞고, 반면에 체구가 큰 말은 평야, 초원, 사막과 같은 지형에 적합하다.

과하마는 부여, 고구려, 동예 등에서 생산되다가 남쪽 백제 지역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전래 시기는 온조(溫祚)의 남하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에 “현종 개원(開元, 713∼741) 연간에 자주 입조(入朝)하여 과하마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신라에도 과하마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말을 수출한 나라는 발해였다. 당나라는 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亂)을 겪으면서 지방의 통제가 느슨해졌고, 그 결과 각지에서 번진(藩鎭) 세력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고구려계 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 이납(李納),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로 이어지는 이씨 일가의 세력이다. 그들은 신라와 해상 교통이 편리한 산둥 반도(山東半島) 전역을 장악하여, 3대에 걸쳐 55년간(765∼819)이나 치외 법권적인 번진 세력으로 당나라 안의 소왕국(小王國)으로 군림하였다.

후희일(侯希逸)의 뒤를 이어 평로치청번진(平盧淄靑藩鎭)의 책임자가 된 이정기는 고구려인이다. 그리고 이정기의 세력 밑에서 벼슬하던 많은 사람도 이정기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많았다. 평로치청번진에 거주하면서 삶을 유지하던 평민들 역시 고구려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평로치청번진이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직명(職名)은 ‘평로치청절도관찰사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藩使)’인데, 이 직명은 기미 정책(羈靡政策)으로 주변의 다른 민족을 통치하던 당나라가 변방의 국가 통치에 대한 업무를 부여할 때 제수하는 것 이었다. 즉, 이 직책은 ‘신라와 발해의 두 나라를 대상으로 하고 그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할하는 장관’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구당서』에 발해의 명마가 계속하여 이정기의 평로치청번진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통해 볼 때, 발해와의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말이 당나라 조정과 대립 관계에 있던 이정기 번진에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서귀도가 발해에 기병을 요청하였을 때 응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인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정기의 치청번진에서의 무역 활동을 소그드인이 주도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평로군이 산둥으로 이동하기 전 영주에는 당시 중국 동북 최대의 소그드인 거주지가 있었는데, 후희일이 해족(奚族)의 침공을 받아 2만여 명의 군을 이끌고 산둥으로 이동할 때 그곳 소그드인의 상당수가 후희일을 따라 함께 남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소그드인은 어디에서든 뛰어난 상업적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그 후 산둥에서도 다수가 상업에 종사하면서 이정기의 외국 및 다른 지역과의 무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정기는 ‘압신라발해양번사’를 겸하였기 때문에 발해 등과의 무역에서 독점적 지위 내지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소그드 상인에게도 매력적이어서 그들을 계속 평로에 머물게 하고 나아가서는 평로 밖의 소그드 상인까지 불러들이는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정기는 다른 어떤 번진보다도 많은 소그드인을 관할하에 두었고, 그들을 통해 활발한 무역 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경제적 수익은 군대 양성과 내치(內治) 등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치청번진과 발해는 어느 정도의 말을 해마다 거래하였을까?

옹희(雍熙)·단홍(端拱) 연간에 연변(沿邊)에서 말을 구입하였는데 …… 경동(京東)에서는 등주(登州)가 중심지였다.292)『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권104, 천성(天聖) 4년 9월조.

예전에 여진이 말을 매매하는 양이 해마다 만 필(匹)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거란에 의해 (그 유입이) 끊겼다.293)『속자치통감장편』 권51, 함평(咸平) 5년 3월 계해.

먼저 앞의 사료는 송나라 초기인 옹희∼단홍 연간(948∼989)에 여진 말을 구입하는 중심지가 등주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뒤의 사료에서는 거란이 여진의 입송(入宋)을 차단하기 이전에, 여진에서 들어오는 말의 숫자가 해마다 만 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발해 때의 기록은 아니지만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이 세운 동단국(東丹國)이나 압록강 하구에 있던 정안국(定安國)을 중심으로 중국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하였던 여진인이나 발해 유민의 활약을 고려할 때, 충분히 비교해 볼 여지가 많다고 하겠다. 아울러 여진이 있던 지역은 바로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영역으로 명마의 산지였다. 고구려의 과하마나 발해의 솔빈마(率賓馬)가 명성이 있었다.

아울러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다수 존재하던 발해의 입장에서도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와 평로치청번진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기 일가의 치청번진이 산둥 반도에 있던 765∼819년의 시기에, 발해는 28차례나 되는 많은 사절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따라서 발해는 이정기의 평로치청번진과 교류하면서 동시에 이정기 번진과 대립 관계에 있던 당나라 조정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국력 신장을 위한 꾸준한 내적인 개혁과 대당 관계, 특히 당나라 조정과 번진 세력 사이에서의 적절한 외교를 통해 신라보다 국제적 위치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당시 안사의 난 이후 번진 세력의 할거로 계속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당나라가 이정기의 평로치청번진과도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는 발해를 회유하기 위하여 발해에 계속적으로 진봉(進奉)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말의 수출은 발해 멸망 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 유민의 해상 기술을 활용하여, 오대(五代)를 협공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있던 남당(南唐)에 바다를 통하여 대량의 말을 수출하고, 차와 비단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

확대보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팝업창 닫기

고려시대에 말과 관련된 기록은 여진이나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나온다. 먼저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여진은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 고려로부터 생활필수품을 얻어 갔다. 그런데 여진이 바친 공물 중에는 마필이 가장 많았다. 고려는 여진과의 통교를 원만히 하고자 여러 교역품 가운데 마필의 가격을 결정하였다. 당시에 정종(定宗)은 말의 가격을 3등분하여, 1등마는 은 주전자 하나에 금견(錦絹) 각 한 필, 2등마는 은 주발 하나에 금견 각 한 필, 3등마는 금견 각 한 필을 급여하도록 하였다.294)『고려사』 권2, 세가2, 정종 3년 9월. 고려가 여진에 대해서 이러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그들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마필을 얻는 반면 그들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함으로써 산발적인 약탈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가 여진과 교역한 마필의 종류로 토마(土馬), 흑수마(黑水馬) 등이 있었다. 전자는 왜소하고 후자는 비대하였다고 한다. 특히 후삼국의 정립 시대에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말의 수요가 많아졌는데, 지리적인 이점을 가진 고려는 이에 편승하여 대량의 말을 사들였던 것이다. 고려는 이 가운데 일부를 다시 중국에 수출하였다.

말과 관련된 원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1231∼1275년까지는 몽고에게 일방적으로 약탈을 당하던 시기라 할 수 있고, 1275∼1281년까지는 수탈과 병행해서 목마(牧馬) 사업 등이 크게 진행되어 장차의 수탈에 대비한 장기적인 대책이 마련되던 시기이며, 1282년 이후는 정책적 측면에서 마필의 교역이 이루어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확대보기
팔준도 중 응상백
팔준도 중 응상백
팝업창 닫기

그 이후에도 말은 외교상 중요한 수출품이 되어 수요는 더욱 증가하였다. 특히 명나라가 대원 정벌 등의 필요로 말을 요구하여 1372년(공민왕 21)부터 수출하여 왔는데, 1386년(우왕 12)에는 그동안 명나라에 보낸 금·은·말 등의 조공품 중에서 오직 말만 50필을 3년에 한 번 보내기로 두 나라가 합의하였다. 또한 수시로 계속된 명나라의 매매 요구에 응하여 1391년(공양왕 3)까지 약 3만 필의 말을 수출하였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는 국내외적으로 불안한 정세에 대비하기 위하여 더욱 심하게 징마를 요구하여 왔다. 그 가운데 해마다 보내는 세공마(歲貢馬)와 3년마다 보내는 식년마(式年馬)를 비롯하여 부정기적인 징마 요구 등이 있었거니와, 이에 마정(馬政)은 국내 수요보다 명나라에 말을 증여하거나 우리나라 말을 명나라의 비단, 포목과 교환하는 일에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년 정조(正朝)·절일(節日)·천추절(千秋節)에 보내는 세공마는 식년마와 더불어 양국 친선 외교의 중요 행사로서 국왕은 물론 의정부, 예조, 사복시(司僕寺), 승문원(承文院), 진헌관 마색(進獻官馬色) 등의 치밀한 계획 아래 준비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은 명나라의 강제적인 역환마(易換馬) 요구에 수시로 대량의 말을 수출하였다. 마침내 이로 인한 과중한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고, 국내에 말이 부족하게 되어 “사대(事大)와 예로 말하면 말을 바치지 않을 수 없고, 종사(宗社)의 계책으로 말하면 많이 바칠 수 없다.”295)『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1월 임오.는 지경에 봉착하였다.

이렇게 명나라에 수출한 말의 숫자는 기록의 미비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조선 초기인 1392∼1481년까지 59년 동안에 6만 3310필을 수출하였는데, 86%인 5만 8611필은 1392∼1427년 사이에 보낸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