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1. 한국 여성의 이미지
  • 역사의 시련과 억척스런 여성의 탄생
허영란

개항 이후의 격동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사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이와 같은 혼란과 고통 속에서 전통적인 가부장제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주의 통치 아래 형성된 식민지 사회 구조에서 남성이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은 제한되었고, 그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공적 영역은 극도로 왜곡되었다. 뿌리 내릴 토양이 근본적으로 훼손된 식민지에서 근대적인 고등 교육을 받은 남성은 현실에 좌절하면서 이상에 맞지 않는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가족을 등졌다. 아울러 독립 운동이나 돈벌이를 위해 또는 강제 징용과 징병을 당해 많은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 가족을 떠나가야 했다.

남성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건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었다. 강인하고 억척스런 한국 여성은 각각의 가족에게 닥친 역사적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던 여성의 불가피한 운명 속에서 출현하였다. 어머니는 실질적으로 가정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자녀들과 자기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였다. 여성의 저력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발휘되어야 했다.8)조혜정, 앞의 글, 53∼54쪽.

광복이 되자 식민 권력은 물러갔지만, 곧이어 벌어진 전쟁과 그로 인한 곤궁 속에서 여성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1950년대에는 최소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전쟁미망인이 발생하였는데,9)이임하, 『1950년대 여성의 삶과 사회적 담론』, 성균관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2, 14∼21쪽. 그들은 대부분 극빈 상태 에서 여러 명의 자녀와 노부모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10)보건 사회부, 『부녀 행정 40년사』, 보건 사회부, 1987, 제3편 제3장 제3절,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 여성사 지식 정보 시스템(www.womenshistory.re.kr:7070/) 참조. 여성은 주저할 겨를도 없이 오직 살기 위해서 시장으로, 거리로 나갔다. 별다른 밑천이 없어도 뛰어들 수 있는 일은 장사였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가재도구나 옷가지를 내다 팔고, 구호품이나 거래 금지 상품을 암거래하는 등 다양한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 시장을 가득 채운 이들은 여인네들이었다.11)김혜수, 「시장에 가면 전부 여인들뿐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청년사, 1999,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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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의 노점상
광복 직후의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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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시동생, 시아버지가 북으로 간 후) 우리는 쌀이 한 가마니 있었어. 먹을 거라는 것은. …… 그 쌀 남은 걸로 떡을 좀 해줘. 내가 그 인민군 상대로 내가 가서 떡을 좀 팔아 볼 테니…… 그래가지고 떡을 해서는 파는데, 영하 몇 도 십칠 도고, 발고락이 시리고……12)구술 정재영·면담 송도영, 「인사동 한정식집 할머니의 생애사」, 『주민 생애사를 통해 본 20세기 서울 현대사』, 서울학 연구소, 2000, 74∼75쪽.

이 인터뷰의 구술자 정재영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하였다. 그러나 집안 남성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된 후 느닷없이 생활고에 직면하였다. 하는 수 없이 떡 장사를 시작으로, 만두 장사, 밥 장사, 구호품 장사를 거쳐 양품점, 다방, 한식당 운영에 이르는 길고 긴 장삿길로 나섰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호사스런 집에서 곱게 지내 오던 젊은 아씨를 하루아침에 ‘한이 맺힌’ 생활 전선으로 내몰았다.

장사만 한다면은 아직도 한강물에 나가 빠져 죽으래, 어머니가. 장사하고 그러는 거. …… 그런데 난 밥 장사를 꼭 하고 싶어.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근데 안 시키셨어. 그래가지고 어머니하구 그냥 근근이…… 아유, 뭐 맥없이 살았지, 뭐. 어유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그러다가 아유, 하여튼 없는 생활 많이 했어. 어휴, 한이 맺혀.13)구술 정재영·면담 송도영, 앞의 자료, 85쪽.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도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로서, 산업화에 공헌하는 노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여성은 ‘복부인(福婦人)’으로서 가족의 경제적 상승을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당사자였으며, 자녀 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였다. 이처럼 여성이 담당하는 가족 지위의 재생산 활동은 선진 공업국보다 후발 공업국에서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는 사회 여건일수록 여성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14)조혜정, 앞의 글, 51∼52쪽. ‘억척스럽고 유별난 한국 여성’은 이러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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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의 동대문 시장
1951년의 동대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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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과 함께 핵가족이 차츰 보편적인 가족 현상으로 정착하였다. 1960년에 이미 핵가족 가구 수가 64.7%에 달하였으며, 20년 후인 1980년에는 68.3%로 늘어났다.15)보건 사회부, 「보건 사회 백서」, 1984, 388쪽, 보건 사회부, 『부녀 행정 40년사』, 보건 사회부, 1987, 제1편 제2절 재인용.

직장에서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가장을 위해 여성은 가정에 남아 가사 노동을 책임지면서 가족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주부로,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어머니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중산층 가정에서는 남편이 경제적 부양 책임자로서 직장 생활을 하는 대신 아내는 집 안에서 살림을 맡아서 소비 생활을 책임지는 역할 분담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도시 서민층 여성은 상업이나 공업, 서비스업에서 노동을 하는 동시에 살림까지 맡아야 하는 이중의 책임을 졌다. 농촌 여성 역시 살림살이 외에 농사일까지 감당해야 했다.16)이효재, 「여성은 지역 사회의 주인이다」, 『여성』 통권 92·94, 여성 단체 연합회, 1973(이 책은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 여성사 지식 정보 시스템에서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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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의 어느 시장
1960년 서울의 어느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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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도시화, 그에 따른 가족 관계의 변화는 전통적인 남존여비의식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규범적 질서를 크게 약화시켰다. 남녀유별(男女有別)에 대한 강박 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아내보다는 가족 전체를 통솔하는 어머니상이 오늘날까지 여성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노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빠듯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책임도 주부가 맡아야 했다. 주부가 가정 경제를 거의 전적으로 관리하는 현상은 살림을 알뜰하게 꾸리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원인이 있지만, 살림을 유지하고 부흥시키는 책임을 여성에게 변함없이 지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7)조혜정, 앞의 글, 57∼62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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