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2. 여성의 장삿길
  • 오일장 나들이
허영란

전국 어디서나 열리는 오일장은 상업에 종사하지 않는 여성에게까지 상행위에 참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가정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장으로 가져가서 팔고 대신 가정에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였다. 오일장을 출입하는 대다수는 전문적인 상인이 아니라 평범한 농민이었다. 그들은 시장이 열리는 시간에, 그것도 잠깐 동안만 상인으로 변신하였다가 곧이어 구매자가 되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광복 전까지, 특히 남부 지방에서는 오일장을 출입하는 일반 여성이 흔치 않았다.

(내가 어릴 때) 그때 장은 여자 잘 안 댕겨. 어지간해서. 그때는 남자가 다 가.22)구술 박호배(1919년생)·면담 허영란, 2005년 11월 4일(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구술 자료). 박호배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몇 년 간 일본을 다녀온 이래 그곳에서 내내 거주하였다.

시장 가는 거…… 그 때는, 내 어릴 적에는 시장도 여자들이 안 갔다. 안 갔는데. 남자들이 똑 가서 뭐 사다 주고, 제사장도 남자들이 사가 오고, 뭐 돈도 가 가서 남자들이 사고 오고, 이랬는데. 인자 그러구로, 그러구로, 이 세상이 야박한 게 모두 여자들이, 나도 골짜기 살 적에 뭐 감 같은 거 있으면 이고 가서 팔아가지고 그거 팔아가 보태가지고 뭐 또 살 거도 사고. 그래 저 이고 댕기 샀다 아니가. 이고 댕기고.23)구술 서석림(1916년생)·면담 허영란, 2004년 5월 16일(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구술 자료). 서석림은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나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광복 때까지도 남부 지방에서는 대체로 남성이 시장 출입을 전담하였 다. 가계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총괄적인 관리는 가장인 남성의 몫이었으며, “봉건 사회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소비 생활에 필요한 상품은 남자가 조달하였다.”24)이은복, 「주부와 상품 지식」, 『소비자와 가정 경제』, 여성 문제 연구회, 1965(이 자료는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 여성사 지식 정보 시스템에서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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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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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조선 총독부는 여성의 시장 출입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남성의 잦은 시장 나들이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에는 주점이 즐비하고 도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오락거리가 있었다. 굳이 물건을 팔고 살 계획이 없더라도 오일장은 중요한 여가 겸 놀이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식민 당국이 보기에 잦은 오일장 출입에서 발생하는 문제 곧 시장을 오가는 시간, 시장에서 벌어지는 술자리, 도박, 언쟁 등은 농촌의 노동 생산력을 낭비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관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를 아예 없애거나 장날을 줄이기도 쉽지 않았다. 농민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식민 당국이 시장 나들이로 인한 폐해라도 줄이기 위해 강구한 타협책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시장 출입을 장려하는 방안이었다. 그것을 통해 음주·오락·싸움 등 장터에서 벌어지는 폐해도 없애고, 동시에 농업 노동력 의 낭비도 줄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25)허영란, 「조선 총독부의 오일장에 대한 통제 및 활용과 그 한계」, 『사학 연구』 82, 한국 사학회, 2006, 138∼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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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의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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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에 여자보다 남자가 많이 나와서 음주 등 그 폐해가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남자보다 가정의 여자를 장날에 나가게 하여 늘 내방(內旁)에서 은거하고 있는 가정 부녀로 하여금 외계(外界)에 접하게 하는 동시에 앞에서 말한 남자 음주의 폐해를 막게 하여 한편으로 농가 경제의 낭비를 절약하게 하자.26)「시일 감축은 점진적 협의 사항을 최후로 지사회의 종료」,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4월 22일자.

1910년대부터 일제는 여성의 외부 노동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외부 노동과 시장 출입을 기피하는 것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배적인 문화였다. 시장 출입은 여가, 오락, 교제 등 일상생활에서의 일탈을 가능하게 해주어 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러한 자유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천한 행동거지를 낳을 위험성도 있다는 이유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가문의 위신을 중시하는 양반층일수록 그런 관념은 더욱 강하였다.27)이만갑, 『한국 농촌 사회의 연구』, 다락원, 1981, 224쪽. 또한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농가에서 생 산한 농산물을 장에 내다 파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육체노동을 요구하였던 사정도 여성의 시장 출입을 어렵게 만든 커다란 요인이었다.28)정승모, 「농촌 정기 시장 체계와 농민 지역 사회 구조」, 『호남 문화 연구』 3, 전남 대학교 호남 문화 연구소, 1983, 260∼261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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