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2. 여성의 장삿길
  • 시장 잘 보는 함경도 여성
허영란

북부 지방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특히 함경도에서만은 여성의 장시 출입이 매우 일반적이었다. 농민이나 상인 할 것 없이 시장을 출입하는 과반수가 여성이었다.29)朝鮮總督府, 『朝鮮の市場』, 1924, 朝鮮總督府, 55∼57쪽 ; 「함남에서 본 이꼴 저꼴」, 『개벽(開闢)』 53호, 1924년 11월. 남부 지방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오일장을 출입하는 여성이 많았고 그들은 육체노동도 서슴지 않았다.

확대보기
함경도 여성들
함경도 여성들
팝업창 닫기

전라도나 경상도에도 해변의 일부분 여자들은 장시를 보는 일이 있지만은 함경도에는 어느 지방을 물론하고 여자들이 전부 장시를 본다. 서울의 야시(夜市)에 여자의 구경꾼이 많은 까닭에 야시가 안이라 여시(女市)라는 말까지 있지만은 함경도의 시장은 참으로 여시장(女市場)이다. 곡물, 어물은 물론이고 채소, 과물, 도기, 심지어 나무 장사까지도 여자들이 한다. 그들은 농사와 길쌈에도 열심이지만은 특히 장시 보는 데는 특권을 가진 것 같다. 시장날이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시장에 간다. 트레머리에 함박수건을 눌러쓰고 울긋불긋한 긴 옷고름을 흩날리며 맨발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기관(奇觀)이어니와 “감잡젓 삽세. 물조개젓 삼세. 맛이 조외다. 엇그제 그 아바이 그럼메 나는 앵이 팜메……” 하고 떠들 때에는 그곳 사투리에 익지 못한 우리 남방의 사람으로서는 어떤 소리인지 잘 알지도 못할 것이다.30)「팔도여자 살님사리 평판기」, 『별건곤』 16·17, 1928년 12월, 137쪽.

함경도에서는 여성이 장시를 지배하였다. 시장에 갈 때도 남성이 물건을 운반해 주는 일이 거의 없고 여성이 직접 운반하였다. 황해도 여성이 광주리를 잘 이는 것이 특색이라면 함경도 여성은 함지를 잘 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함지에는 콩, 팥, 귀리, 강냉이, 좁쌀 같은 곡물은 물론이고 계란, 생닭, 어물, 각종 채소나 과일 등 별의별 것을 다 담았다. 돼지 새끼까지 끼고 다니면서 파는 여자도 있었다. 물건을 “산더미 같이 인 중에도 아이를 또 업고 안고서 맨발로 큰 산과 물을 건너 30, 40리 혹은 50, 60리를 어렵지 않게 다니는 것”31)「팔도여자 살님사리 평판기」, 『별건곤』 16·17, 1928년 12월, 137쪽.이 함경도 여성이었다.

확대보기
일제 강점기의 함흥 시장 풍경
일제 강점기의 함흥 시장 풍경
팝업창 닫기

여성의 시장 출입은 가정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주었다. 시장에서의 활동을 매개로 경제적 능력을 키울 수 있어서 가계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에 참가하는 함경도 여성은 금전 관념이 강하고 가정에서 경제적 실권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에서 여자 해방이란 말은 중남부에서 할 것이지 이 함경도에서는 도리어 남자가 해방을 주창할 만”하다32)「팔도여자 살님사리 평판기」, 『별건곤』 16·17, 1928년 12월, 137쪽.는 말까지 나왔다.

그 때문인지 함경도에서는 여성의 시장 출입을 권장하던 농촌 진흥 운동 시기에 당국의 방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러한 시도의 이면에는 시장 출입 자체보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강한 여성의 발언권, 여성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 북부 지방 여성이 장보기를 일종의 나들이로 간주하여 아무 용건이 없으면서도 옷을 갖추어 입고 무리를 지어 식당과 술집을 돌아다니는 ‘악습 폐풍(惡習弊風)’을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33)「시장제(市場制)의 개선(改善)」, 『매일신보』 1934년 3월 8일자.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 면장은 구장(區長) 회의를 열어서 덕산면 여성의 시장 출입을 일방적으로 금지시켰다. 면장은 여성이 시장을 출입하면서, 풍기문란, 사치품 매매 등 농촌 진흥상 큰 영향이 있다고 주장하여 구장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면장의 권한 아래 오일장을 출입하는 여성을 감시하기로 결정하였다.34)「부녀(婦女) 시장 출입 금지(市場出入禁止)로 길주군(吉州郡) 금천(錦川)에서 시민 대회(市民大會)」, 『동아일보(東亞日報)』 1933년 6월 22일자 ; 「면장 정책(面長政策)을 철시(撤市)코 반대(反對), 시장에 출입을 금지한 까닭」, 『동아일보』 1933년 9월 19일자 ; 「면(面)의 부당 간섭(不當干涉)으로 시장(市場)에 부녀 금지(婦女禁止)」,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3년 6월 26일자. 한편 명천군 서면에서도 풍기문란과 경제상의 이유를 들어 여자의 시장 출입을 금지하고 만일 시장에 간 것이 발각되면 벌금 50전을 징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노인들은 이를 찬성하는 모양이나 청년 남녀들은 여자 해방 운동을 하는 이때에 그렇게 감옥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하고도 야만적 행동이라”35)「여자(女子) 시장(市場)으로 가면 벌금(罰金) 오십전야(五十錢也)」, 『동아일보』 1933년 8월 16일자.는 비평이 분분하였다.

농촌 진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목적은 여성의 경제권과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임을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총독부가 남성 대신에 여성을 시장에 나오게 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노력하던 시기에, 함경도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식민 당국의 명분을 역이용해서 여성의 시장 출입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여성의 시장 출입이 결과적으로 여성의 자립성, 자유, 권리를 신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