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2. 여성의 장삿길
  • 시장 출입, 경제권과 자유
허영란

1940년대에는 전시 동원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문제였다. 때문에 총독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을 노동력으로 동원하고자 하였다. 기존에 감당하고 있던 가사 노동, 농업 노동, 부업 노동 외에도 여러 가지 야 외 노동에 대한 여성 동원이 심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전반적인 사회 활동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시장 출입 관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시 통제기에도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남성이며 여성은 나가지 않았다. 지금도 양반층에서는 여성이 시장 같은 것에 나갈 수 없는”36)鈴木榮太郞, 『朝鮮農村社會踏査記』, 大阪屋號書店, 1944, 52쪽. 상태였다. 1942∼1943년경부터는 극심한 물자난으로 인해 오일장 자체가 축소되거나 정지되었다. 그러나 통제 경제 아래에서 심각한 물자 부족으로 생계가 위기에 놓이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암거래와 불법 상행위에 뛰어드는 여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37)警務局 經濟警察課, 「女子行商人の闇取引」, 『情報週間展望』 第14集, 1941年 6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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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장 출입은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대 초 천안, 군위, 담양에서는 시장 출입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20.7%에 불과하였지만,38)이만갑, 앞의 책, 223∼225쪽. 1965년 1월의 용인군 조사에서는 여성의 시장 출입 비율이 조금 더 높았다.39)김영모, 「농촌 주민의 공동 생활권(共同生活圈)의 측정을 위한 기초 연구」, 『한국 사회학』 2, 한국 사회학회, 1966, 47쪽. 1975년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54.6%로 더욱 높아졌으며,40)김성훈, 『한국 농촌 시장의 제도와 기능 연구』, 국립 농업 경제 연구소, 1977, 249쪽. 1976년의 조사에서는 시장에 나온 사람의 80% 이상이 여성 이었다.41)이성덕, 1976, 85∼86쪽, 이재하·홍순완, 『한국의 시장』, 민음사, 1992, 139쪽 재인용.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시장 출입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농촌 여성은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거나 가정의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장시로 나왔다. 1976년에 안성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여성 가운데 38.7%는 월 1∼2회, 21.7%는 월 3∼4회, 19.5%는 월 5∼6회 시장을 출입한다고 답하였다. 80% 가까운 여성이 많든 적든 시장을 출입하고 있다. 물론 시장 출입을 거의 안 한다는 응답도 20.1%였다. 읍내 시장으로 가는 버스 편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이거나 마을의 구판장 사업이 활발한 경우에는 시장에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비율이 약간 높았다.42)김주숙, 『한국 농촌의 여성과 가족』, 한울 아카데미, 1994, 55쪽.

여성의 오일장 출입이 늘었다고 해서 가족의 의식주나 가사와 관련된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농촌의 주부가 가정에 필요한 반찬이나 기타 필수품을 주로 구입한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이지만, 농촌 여성의 시장 출입을 제한하던 과거에 비해 볼 때 지위와 역할에 커다란 변화”43)김주숙, 앞의 책, 49쪽.가 나타났다. 1980년의 조사에 따르면, 대략 41% 정도의 농촌 여성이 스스로 생산한 상품을 판매해 본 경험이 있다. 그들의 판매 활동 중 대부분은 오일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비록 많지 않은 액수의 수입을 얻었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세한 농가 여성에게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44)김주숙, 앞의 책, 141∼145쪽. 오일장은 농촌 여성의 경제권을 신장시킴으로써 가정에서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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