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4. 소비가 아니라 저축
  • 주부의 소비 결정권
허영란

비록 ‘기아선상의 소비 생활’이기는 해도 가계의 소비 행위에 대한 결정권은 주부에게 넘어왔다. 그것은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까지는 농촌 가정의 소비 결정권을 남편이 쥐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전적으로 남편이 집안의 소비를 결정한다고 답한 응답자가 44%였다. 남편이 대체로 돈을 쥐고 쓴다는 비율은 20.8%였다. 무려 65%의 가구에서 남편이 소비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77)고황경 외, 『한국 농촌 가족의 연구』, 1963, 서울 대학교 출판부, 46쪽 : 김주숙, 앞의 책, 51쪽 재인용. 그러나 1976년의 조사에서는 소비 결정권을 농촌 주부가 가진 경우가 현저하게 신장되었다. “집안 살림살이에 쓰는 돈을 누가 쥐고 쓰는가?”라는 질문에 남편이 전적으로 또는 대개 쥐고 쓴다는 답변이 35.5%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아내가 전부 또는 대개 쥐고 쓴다는 답변은 51.1%로, 전체의 절반가량은 아내에게 소비 결정권이 있다고 답하였다.78)김주숙, 앞의 책, 51쪽. 1987년의 조사에서는 남편이 소비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4.7%, 아내에게 소비 결정권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47.9%였다.79)김주숙, 앞의 책, 359∼361쪽. 1970년대에 비해 남편의 소비 결정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각 시기별로 조사 대상 지역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농촌에서도 가정의 소비 결정권이 주부에게 이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농촌에서는 의식주 등 생활용품 구입에 관한 것은 주로 아내가 담당하고, 남편은 은행 융자나 사채 얻기, 경작할 농작물 종류 정하기 같이 대외적 책임이 따르는 일을 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자녀 교육 문제나 큰 살림 도구의 구입, 친척 돕는 일 등은 부부가 공동으로 결정하였다. 1980년경까지도 여전히 큰 살림 도구를 장만할 때 아내가 혼자 결정한다는 비율은 낮은 편이고, 남편의 발언권이 아내보다 훨씬 컸다.80)김주숙, 앞의 책, 71쪽, 157쪽. 그런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자본주의형 소비 사회로 전환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에 걸쳐 농촌에서도 남편의 소비 결정권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아내에게 이전되었다.

전통적으로 가족의 의식주를 책임져 온 주부는 가족이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소비 사회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가정 밖의 공적 영역과 점점 분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신에 가정 안에서는 오히려 더욱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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