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5. 의무로서의 소비, 쾌락으로서의 소비
  • 의무로서의 소비,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허영란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는 남성의 영역과 여성의 영역이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직장에서 과잉 노동에 시달리는 남편은 가정 내의 의사 결정과 지역 사회에서의 활동을 아내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직장 생활로 인해 남편이 가정에 할애하는 시간이 극도로 제한되는 가운데 가족생활은 사실상 어머니와 자녀만을 중심으로 영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86)문옥표, 앞의 글, 196∼205쪽.

가사 분담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도시 생활에서 가사의 범위는 가족 내부의 가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자녀의 교육 문제나 지역 사회에서 요구되는 각종 활동까지를 포괄한다. 그런데 표 ‘가사 분담 실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문제 대부분을 관리하고 결정하는 책임이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 되었다.

<표> 가사 분담 실태
조사 시기 : 2002년, 단위 : %
구분 부인이
전적으로 책임
부인이 주로
남편도 분담
공평하게
분담
남편이
주도
남편이 주로
부인도 분담
남편이
전적으로 책임
비율 37.9 51.0 8.1 3.0 2.5 0.5
✽통계청 홈페이지(http://www.nso.go.kr) 통계 정보 시스템(KOSIS).

오늘날 가정의 소비 결정권, 가사에 대한 결정권은 주부의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주부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중산층 전업 주부가 책임지고 있는 구체적인 일은 가정 내의 가사와 관련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지역 사회와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소비와 관련하여 ‘가계에 대한 경제적 기여’는 전 업 주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선 그들의 책임은 남편의 수입으로 구성되는 가계 소득을 규모 있게 운영하여 제한된 수입의 범위 내에서 가족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부는 대부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인다. 의식주를 위한 기본 장보기 외에도 의류, 가구의 구입, 상품의 소비에 힘을 기울이고, 나아가 가족의 지위를 재생산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도시 중산층 가구에서는 부부 역할에 대한 일반적 구분 관행에 따라 주부가 물품 구입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로 인해 때때로 주부는 ‘소비만 일삼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비난에 노출되기도 한다.

반대로 아내는 남편이 제공하는 수입의 범위 안에서 생활비의 집행권만을 위임받았을 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87)문옥표, 앞의 글, 209∼212쪽.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성에게 점점 더 가사와 소비에 대한 결정권이 집중되고 있다. 가정에서 주부의 책임이 점점 커지는 데 비례해서 여성의 자율성 또한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갖게 된 가사에 대한 전반적 책임은 이제 일종의 권한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생산과 소비, 직장과 가정이 분리되는 핵가족화나 성 역할 구분은 하층 노동자나 저소득 계층보다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전문 관리직에 종사하는 계층, 곧 신중산층을 중심으로 나타났다.88)김은희는 신중산층을 관리직·전문직·행정직 종사자와 그 가족으로 정의하고 있다(김은희, 「신중산층의 일·가족, 그리고 성 역할의 의미」, 『성, 가족, 그리고 문화─인류학적 접근─』, 집문당, 1997, 238쪽). 1990년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 신중산층 주부의 일은 기본적인 가사와 물건 구매, 세금 납부, 자녀 교육, 집안 행사, 친척 관계 관리까지 다양하다. 아내는 이러한 일을 책임지는 동시에 가정의 수입을 관리하고 소비를 결정한다. 그들은 가사 노동의 부담을 지는 대신에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알아서 살림할 권리와 책임’을 갖는다. 젊은 남편 대다수가 월급을 아내에게 갖다 주고 용돈을 타서 쓴다. 거개의 가정에서 아내가 소비하고 저축하는 문제를 결정하며, 남편은 ‘알아서’ 하라고 맡긴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결정은 남편과 의논한다고 하지만, 의논은 거의 형식적이고 대개 아내가 결정한다. 재산은 대개 남편 이름 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재산의 운용에도 아내가 간여하고 있다. 남편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내가 재산 증식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며 주택 구입까지 결정하기도 한다.89)김은희, 앞의 글, 257∼259쪽. 아내는 살림을 책임지는 데서 더 나아가 재테크까지 맡아 하고 있다. 한 광고 회사가 2001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주부의 67%가 재테크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84%가 주부 자신이 하거나 남편과 상의하여 한다고 답하였다.90)이영희, 『광고는 여성 소비자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예경, 2002, 107쪽.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소멸된 것은 물론 아니다. 소비 행위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은 쾌락을 추구하는 소비자이기보다는 의무를 다하는 주부이자 아내여야 한다. 여성의 소비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행위이다. “남편 귀가 시간은 여자하기 나름”91)마정미,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 문화사』, 개마고원, 2004, 218쪽.이라는 애교 어린 광고는 여성의 의무를 환기시키는 주문과도 같다. 1980년대 후반에 만개한 소비문화의 향연 속에서 소비자의 눈과 귀를 모은 한 가전제품의 광고 문구는 여성 소비자를 공략하기는 하되, 그들의 소비가 자신을 위한 쾌락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의무의 이행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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