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5. 의무로서의 소비, 쾌락으로서의 소비
  • 소비 주체, 그러나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다워야 한다
허영란

구매 결정과 구매 행위가 점점 더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주부를 유혹하는 수많은 광고가 웅변하고 있는 사실이다. 여성은 남편이나 자녀의 구매 행위도 대신해 준다. 그뿐 아니라 주택과 같은 부동산의 구입에서도 주부의 취향과 욕망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성은 모든 광고의 직접적이고 주된 목표가 되었다.

최근에는 “단순히 경제 활동 측면에서 여성 소비자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에서 나아가 보다 포괄적으로 가정 내 소비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 및 위상 변화를 심층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시점에 도달”92)홍성태, 『대한민국 여성 소비자 :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패턴』, 세종 서적, 2005, 20쪽.하였다는 진단과 함 께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들의 삶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93)홍성태, 앞의 책, 21쪽.까지 시도하고 있다. 업계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움직임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어떤 분야보다도 한 발 앞서 현실을 포착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업계로서는 그러한 변화의 배경이나 과정,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정말로 ‘소비의 주체’가 된 것이다.

여성에 대한 사회의 태도와 인식도 변화해 왔다. 한편에서는 집요하게 여성 소비자를 유혹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유혹에 반응하는 여성에 대한 비하와 비판이 끈질기게 나타났다.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구체적 양태를 바꾸어 가면서 지난 100년 동안 거듭 재생산되어 왔다.

사치품을 구입하고 유행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상품에 반응하는 자본주의형 소비자로서의 여성층이 우리 사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년대였다. 신여성 또는 모던 걸이라고 불린 그들은 소수였지만 존재감은 뚜렷하였다. 그들이 여성사에서 남긴 흔적은 컸지만, 당시 사회의 시선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봉건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근대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이고자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남성에 기생하면서 사치와 허영에 몸을 맡긴 소외된 존재였다. 그들을 한국 여성사에 어떻게 위치 짓고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94)‘신여성’에 대한 연구서로는 문옥표 외, 『신여성』, 청년사, 2003 ; 태혜숙 외,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 공간』, 여성 문화 이론 연구소, 2004 ;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 역사, 2004, 참조. 그것은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인식 문제와 직결된다.

1925년에 일부 (남성) 지식인은 신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신여성은 교육과 학식과 이론이 높고 쾌활하며 결단력을 가진 것이 장점이지만, 허황되고 사치하며 안일하고 도덕이 희박하며 오만하고 사려가 부족한 것이 단점이라는 것이다.95)「신여성의 장처, 단처」, 『신여성』 1925년 6월호. 소비자로서의 신여성에 대해 특히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내었다. 신여성이나 모던 걸은 사치와 직결되고 사치는 도덕적 해이를 의미하였다. 자본주의가 쏟아내는 상품 소비자라는 측면에서 여성은 탐욕적이고 충동적이며 비생산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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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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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1996년에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이 피동적이거나 남성 의존적이라는 고정관념은 확실하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남학생이 볼 때 “여학생은 소비 지향적이고 외모에 너무 신경을 쓰는” 존재이다.96)이영자,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 나남 출판, 2000, 241∼242쪽. 종래의 성별 고정관념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약점은 소비와 관련되어 있다. 더욱이 멋을 부리는 남성이 숱한 오늘날에도 그들은 종종 ‘여자 같이’ 멋이나 부리는 남자로 비하되곤 한다.

여성 소비자는 대개 비생산적이고 충동적이며 허영에 사로잡힌 존재처럼 인식된다. 반면에 여성의 막중한 책임은 알뜰하게 가계를 지탱하고 살림을 일으키는 것이다. 두 이미지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살림을 책임지는 어머니가 가정을 대표하는 소비 주체이자 주된 소비 결정권자라는 점에서 서로 무관하지 않다. 이 상반된 이미지를 어떻게 겹쳐 놓을 것인가? 답은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이다.

1980년대 말부터 ‘과소비’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주부는 이 ‘사회악’과 싸우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 매는 검약 정신을 되살릴 것을 요구받았다.97)이양교, 앞의 글. 남편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아내는 쾌락을 추구하는 여성 소비자보다 알뜰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알뜰한 아내와 충동적인 여성 소비자는 동일한 여성에게 붙인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회의 필요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릴 따름이다. 아니, 오늘날 여성은 언제나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호명되고 있다. “알뜰한 아내여, 카드를 챙겨 외출하라.”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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