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6. 여성 소비자, 다시 해방을 향하여
허영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이나 행위가 근래에 정착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공적 영역에서부터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그런 일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럴 때, 고정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문득 낯설어지고, 현실의 안정감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는 혼동이 일어나며, 때로는 역사가 가르쳐 주는 ‘변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변화는 어느 특정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근대화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물질생활과 사고방식, 제도와 인식은 모든 차원에서 놀라운 속도와 규모로 격변하였다. 여성의 주관적 의식이나 객관적 지위, 사회적 통념에도 근본적이고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소비 생활과 여성의 관계는 더욱 극적으로 변하여 왔다.

오늘날 전체 시장에서 여성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80∼90%라고 한다. 광고를 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여성이며, 실제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도 거의 여성이다.102)이영희, 앞의 책, 4∼5쪽.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성 차별을 경멸하는 사회가 되었다. 특히 가정에서 여성의 결정권은 압도적이며, 이러한 추세에 가속도가 붙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까지도 “오늘, 이 땅에 태어난 여자가 어째서 사람대접을 받아야 합니까?”103)『뿌리 깊은 나무』 1976년 5월호에 대한 신문 광고 : 마정미, 앞의 책, 186∼187쪽 재인용.라는 물음을 던져 가며 여성의 기본 권익에 대해 사회의 각성을 촉구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여성의 활력은 참으로 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산업화는 생산과 소비의 혁명을 초래하고, 공장과 가정을 동시에 창출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사회와 학계의 관심은 주로 생산과 공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정은 비노동적이고, 가정다운 장소가 되었으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소비 역시 부차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104)피터 코리건, 앞의 책, 168쪽. 그에 입각해서 생산하는 남성과 소비하는 여성의 서열도 자동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를 거치는 동안에,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오히려 현대 사회의 중심 동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러한 소비 사회의 도래와 함께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소비 시장에서 진행된 일은 단적으로 말해 여성을 소비 자본주의에 포섭하는 것이었다. 여성을 어떻게 소비로 끌어들이는가가 소비 시대의 관건이었다. 이제 여성이 구매의 80% 이상을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 소비자를 충동적이며 자본주의의 덫에 걸린 욕망의 노예로 보든, 스스로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나선 소비 주체라고 보든, 그들은 우리 시대를 압도하고 있는 소비문화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과정에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다중적인 질곡과 중층적 가치가 모두 녹아 있다. 남녀 관계의 변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주·객관적 인식의 변화가 내포되어 있으며, 지금 우리 안에 응축되어 있는 한국식 근대성이 내재해 있다.

여성의 가사가 생산보다는 소비와 재생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일’이 아니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자는 주장은 넓게는 소비 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작업 역시 ‘일’의 범주에 포함시키자는 의미를 포함한다.105)문옥표, 앞의 글, 207쪽. 한편에서는 여성의 소비 행위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으며, “사실상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단순한 소비자일 때도 자신이 자율적으로 행동을 한다고 믿을 뿐”106)이재경, 앞의 책, 171쪽. 이라는 소외론적 관점도 제시되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자체가 인간을 소외시키지만, 여성에 대한 왜곡과 소외가 특히 심각하다. 또한 소비 자본주의의 물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여성이 그러한 소비 행위의 직접적 포섭 대상으로서 부상하는 과정을 일종의 주체화 과정으로 해석하려는 노력 역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에 여성은 소비 사회의 주인공으로 부상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증대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서 여성은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적극적 포섭 대상이 되었고, 상업주의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 역시 강화되었다. 오늘날 소비의 대상은 단지 물건이나 용역에 그치지 않는다. 몸도, 감정도, 이미지도, 심지어 인간관계조차도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상징과 기호는 양적·질적으로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다양해졌다. 그에 따라 자아실현의 욕구도 자칫하면 그러한 상징과 기호를 따라 끝없이 부유할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해방과 소외가 교차하는 소비 사회의 이미지는 여성의 주체화라는 과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동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의 제고에 치중해 왔던 여성 운동은 이러한 시대의 조류 속에서 지속 가능한 대안적 소비문화와 가치를 형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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