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1. ‘자유부인’과 화교회
이임하

“오늘이 화교회(花交會) 모이는 날이에요. 오후 한 시에 아서원에서.”

“화교회……? 화교회가 뭐더라?”

“아이 참! 화교회라구, R 대학 동창생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게 먼젓달부터 생겼다고 접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

“어떤 여자들끼리?”

“동창생 중에서도 각계의 지도자적 입장에 있는 부인들과, 실업계의 중역 부인들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기로 되어 있는 것이 화교회예요”107)정비석, 『자유부인』 상, 고려원, 1985, 12∼13쪽.

이 글은 1950년대 영화로 만들어져 숱한 화제를 뿌렸던 소설 『자유부인』의 첫 부분이다. 아직까지도 가정을 뛰쳐나가 방황하는 기혼 여성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자유부인』이 ‘화교회’라는 모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오선영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점심이나 먹으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대학 동창 모임에 참가하면서부터 ‘자유부인’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가난한 대학 교수의 부인인 오선영은 친구들과 자신을 견주어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그 뒤부터 사교춤(댄스)을 배우고 양품점 종업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결국 소설에서 동창생들의 ‘계’모임인 화교회는 주인공을 ‘자유부인’의 길로 이끄는 주요한 고리이다. 이처럼 6·25 전쟁 뒤 한동안 계 모임은 여성의 허영과 사치를 자극하여 타락으로 이끄는 계기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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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부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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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뒤부터 계는 ‘부녀계’라고 불릴 정도로 대부분 여성이 조직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녀계’란 이름의 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글에서는 여성이 조직한 모든 종류의 계를 1950∼1960년대의 표현을 빌려 ‘부녀계’로 부르겠다. 1963년 가입자의 성별에 따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성만 가입한 계가 전체의 49.7%였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가입한 계는 26.5%, 남성만으로 구성된 계는 22.4%였다.108)이창렬, 『한국의 금융과 자본 동원』, 고려 대학교 출판부, 1966, 148쪽. 이 글에서 인용할 ‘1963년 조사’는 모두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여성이 이미 계의 주요한 구성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6·25 전쟁 뒤부터 여성의 경제 활동은 상당 부분 계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또한 계는 여성의 사회생활, 곧 가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부녀계는 유한마담들이 사채놀이를 위해 조직하거나 『자유부인』에 묘사된 것처럼 여성의 사치와 허영을 조장하는 모임으로 여겨졌다. 부녀계를 풍자한 다음의 표현은 이러한 인식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계란 무엇인가.

황천길 직행 뻐스의 시발점이다 - 자살한 계주.

아니 자가용차를 낳아 주는 어미 닭이다 - 자살 전의 계주.

3면 기사 끓고 있는 쓰레기통이다 - 신문 기자.

자유부인을 만드는 곳 - 남편.

집 안 구속을 털어버리는 곳 - 주부.

불장난의 아궁지 - 젊은 과부.109)이창렬, 『계란 무엇인가』, 『여성계』 1955년 9월호, 76쪽.

부녀계를 이처럼 부정적으로 이미지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부녀계는 ‘춤바람’, ‘도박’, ‘치맛바람’과 함께 ‘곗바람’으로 불리면서 가정불화, 이혼, 자녀에 대한 무관심과 가출, 그리고 청소년 범죄를 불러오는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되었다. 곧 부녀계는 비생산적이고 소비적인 여성 활동을 묘사하고 어떻게 여성이 타락하였는가를 가늠하는 지표였다. 그리고 사회는 여성에게 사회에 관심을 갖고 집 밖으로 나오기보다는 남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르는 일에 충실하라고 충고하였다. 이는 여성의 집 밖 활동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였다. 곧 부녀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화는 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사실 계는 6·25 전쟁에 따라 가정 경제가 붕괴되자 사회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여성에게 금융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장삿길에 나서거나 돈벌이를 하는 여성에게 권력과 특혜에 의해 움직이던 금융 기관은 ‘그림의 떡’이었다. 또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은 저축 수단으로서 은행 예금의 실효성을 떨어뜨렸다. 당연히 장사 밑천이든 자식 학자금이든 자금을 조달하려는 여성이나 돈을 저축하고 여윳돈을 불리려는 여성에게 계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아울러 여성은 계 모임을 통해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고 가정 밖 세상과 접촉할 수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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