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설명으로 계가 무진을 대신한 이유는 알 수 있어도 1950년대 중반 온 사회가 들썩거릴 정도로 계가 성행하고 또 당시의 계를 부녀계라고 부른 까닭가지 알 수는 없다. 6·25 전쟁 뒤 계가 전체 은행 예금의 60%에 이를 정도로 성행하고 여성이 계를 주도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당시의 금융 제도가 계를 부추겼다. 잘 알려진 대로 광복 뒤부터 1950년대의 금융 기관은 권력과 특혜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는 권력의 부패와 함께 은행 대출 금리와 시중 금리의 차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로 인해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1955년 광주 계 사건을 조사한 국회 조사단은 계가 대규모로 발생한 배경을 “금리 안정 내지 저금리의 강행은…… 저축 부진에 인한 자금 공급을 곤란케 하는 동시에…… 융자받는다는 것이 이권 혹은 특혜화하였다. 서민 대중은 자구 행위로 고리 융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융자받을 수 있는 특권층은 건전한 투자보다 투기와 고리에 몰두하게 되어 인프레 를 촉발”시켰기120)국회 계 사건 특별 조사 위원회, 「지방 계 실정 보고서」, 『경향신문』 1955년 4월 2일자.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계는 또한 금융 기관의 대출 기능뿐만 아니라 예금 기능까지도 대신하였다. 은행 예금이 안전하기는 해도 낮은 금리를 받아 자금을 축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은 은행 예금보다 높은 금리가 보장되는 계를 선호하였다.
(계를 해서) 목돈 타면은 남 줬다가 이렇게 또 이자 받아서 그렇게 곗돈 넣고, (계를 해서) 또 모으고 그런 거 많이 했지. 그렇게 해서 돈을 키웠지 글 안 허고는 돈을 키울 수 있나. …… 그때는 은행에 들어갈 것이 어디가 있어.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남 좀 주고, 이자 받아서 곗돈 넣고, 또 그렇게 하고 그러고 했지. 그때는 은행도 모르고 살았어.121)구술 양성은·면담 이임하, 2006년 1월 20일(한성 대학교 전쟁과 평화 연구소 소장).
1955년 초 국내의 금융 상황을 살펴보면 총통화 발행고는 400억 환(圜) 정도였으며, 전국 각 금융 기관의 예금과 대출 총액은 각각 170억 환과 225억 환이었다. 그런데 1954년 12월부터 1955년 2월 사이 계의 총액은 약 100억 환으로 추산되었다.122)박노성, 「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여성계』 1955년 9월호, 94쪽. 예금액만을 비교한다면 계는 은행 예금의 60% 정도에 달하였다. 또한 은행의 여신(與信)이 대부분 대기업에 대한 대출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계가 사실상 일반 서민 가계의 금융을 주도하였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계가 성행한 또 다른 원인은 6·25 전쟁으로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인구 이동이 잦아지면서 소규모 상업, 그 중에서도 여성이 운영하는 상업이 늘어난 데 있었다. 표 ‘6·25 전쟁 전후의 상업 종사자 수 변화 추이’는 6·25 전쟁 전인 1949년과 6·25 전쟁이 진행되던 1952년, 그리고 6·25 전쟁 뒤인 1956년, 1958년의 전체 상업 인구와 그 가운데 여성의 수를 비교하였다.
구분 연도 |
전 체 | 여 성 | ||
명 | 1949년 대비(%) | 명 | 1949년 대비(%) | |
1949 | 370,477 | 81,204 | ||
1952 | 1,280,114 | 345.5 | 597,257 | 735.5 |
1956 | 495,462 | 133.7 | 162,175 | 199.7 |
1958 | 530,371 | 143.2 | 187,876 | 231.4 |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 『1952년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3, 29∼30쪽. ✽내무부 통계국, 『제4회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7, 22∼27쪽. ✽내무부 통계국, 『제6회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9, 18∼25쪽. |
6·25 전쟁 뒤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30∼40% 늘었으며 그 가운데 여성은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여기에 통계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행상이나 노점상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농사일과 행상을 병행하는 여성이 많았다. 한 소설가가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이나 자유 시장이나 천변 시장으로 풍경을 구경 하기 위하여 발길을 옮겨 본다. 콩나물 장사, 미역 장사, 더덕 장사부터 시작해서 양담배 장사, 양주 장사, 양과자 장사, 딸라 장사, 양말 장사, 샤쓰 장사, 양단 장사, 나이론 장사, 좌우 옆 포목전의 주인이 모두 다 묘령의 처녀가 아니면 허우대 좋은 점잖은 중년 부인들이다.”123)박종화, 「해방 후의 한국 여성」, 『여원』 1959년 8월호, 74쪽.라고 표현하였듯이 상업에 종사한 여성은 상당히 많았다.
이렇게 상설 시장에서든, 보따리 장사든 장삿길에 나선 여성은 대부분 생활고에 떠밀려 집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든든한 장사 밑천을 가졌을 리 없었고 은행이나 무진 회사에 담보를 맡길 능력을 가진 경우도 드물었다. 그런 여성의 눈길이 머문 곳이 바로 계였다.
가장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 어려워졌다. 주부들도 생활전선에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아직도 수복 전인 서울 거리거리에는 어느새 소매상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남대문, 동대문 주변에는 제법 이러한 소매상들로 쓸쓸하기만 했던 서울에 활기조차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소매상들에 절대적 금융 기관 구실을 해 준 것이 ‘계’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계’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목돈을 만질 수 있었고 이 목돈은 그대로 상업 자본으로 전환되었다. 계를 사회 경제사적으로 볼 때 초기의 그것이 상업 경제의 금융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124)송건호, 「계의 경제학」, 『무역지』 33, 1969, 44∼45쪽.
6·25 전쟁 뒤 부녀계가 성행하는 데에는 당시의 법률 체계도 한몫하였다. 1960년 1월 신민법(新民法)이 시행되기 전 기혼 여성은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구민법(舊民法)의 적용을 받아 미성년자와 같은 경제적 무능력자였다. 처는 ‘원본 영수(原本領收) 내지 이용 행위, 차재(借財) 또는 보증 행위, 부동산 또는 동산에 관한 권리의 득실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소송 행위 또는 영업 행위, 중재 계약 체결 행위’ 따위를 할 때 반드시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125)이효재·김주숙, 『한국 여성의 지위』,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1976, 58쪽. 따라서 여성은 담보가 있어도 무진 회사나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기 어려웠다. 또한 새로이 경제 활동을 시작하거나 이미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도 금융 기관을 이용하거나 계약 관계를 맺는 등 경제적 신용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원인이 겹치면서 6·25 전쟁 뒤부터 전국적으로 부녀계가 성행하였다. 여윳돈을 불리려는 부유층부터 매달 조금씩 저축하려는 월급쟁이 부인, 장사 밑천을 빌리려는 사람 등 다양한 계층이 부녀계에 참여하였고 규모는 금융 기관에 맞먹을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계로 유입되는 농촌 자금만이라도 ‘강제 현물 저축 운동’이나 ‘정기 예금 운동’ 같은 저축이나 대한 금융 조합 연합회의 산하 기구인 식산계를 통하여 흡수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중은 전국에 3만 6000여 개의 식산계가 있는 것을 이용해서 각각 그 마을이나 면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계에 참가하여 협동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현물을 갖다가 맡기고자 할 때는 그 지방에 있는 소관 관리의 허락을 맡아서 미곡 창고를 빌려서 저축해 두었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각각 그 조리를 따라서 팔든지 가져가든지” 하라고 강조하였다.126)『경향신문』 1955년 2월 26일자 ; 「현물이나 금전의 강제 저축 제도를 폐지하라(1955. 2. 24)」, 공보처,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2, 1956, 157쪽.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시도는 강제 저축의 의미가 더 강하였고, 세금이나 잡부금 등의 갹출로 이어졌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6·25 전쟁 뒤 계의 성행은 근본적으로 인플레이션 수습 정책의 실패와 부패한 금융 정책에 따른 현상이었지만 계에는 금융 기관이 갖지 못한 장점도 있었다. 첫째, 계는 계원 사이의 신용과 유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법률상 무능력자로 은행이나 무진 회사와 거래할 수 없었던 여성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둘째, 계는 현금 불입이나 융자 때 비밀이 엄격하게 보장되어 세금과 잡부금 징수를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셋째, 계에는 권력이나 특혜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 금융 기관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서민층이 이용하기에 편리하였다.127)『경향신문』 1955년 3월 8일자. 특히 여성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앞장서 계를 이용하였는데, 고관의 부인에서부터 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하거나 행상을 하는 여성까지 계에 참여하였다.128)『동아일보』 1954년 1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