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3. 6·25 전쟁과 계
  • 부녀계 소동
이임하

6·25 전쟁을 계기로 여성 사이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식리계와 저축성 계에는 몇 가지 위험 요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지적할 문제는 도시 지역 계의 중심이 상설 시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계가 경기 변동에 따라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당시는 경제 외적인 면, 곧 전황(戰況)의 변화나 서울로의 환도(還都) 같은 문제에 따라 각 지역의 경기가 요동쳤기 때문에 상설 시장의 경기 역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물론 농촌 지역의 계도 파산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농지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않는 한 농가의 근본적인 파산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도시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였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문제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계에 중복 가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의 구조는 가입한 계 가운데 규모가 큰 몇 개만 파산해도 연쇄적으로 다른 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54∼1955년의 계 소동은 이러한 연쇄 반응의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상업 자금이나 저축을 목적으로 하는 계와는 다른 목적의 계가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조사부가 특수계라고 부른 이러한 계는 여윳돈을 불리려는 부유층이 많이 참여하였고, 고리 사채화하거나 선거 자금 같은 경제 외적인 부분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특수계는 수가 많지 않았지만 비교적 큰 규모였다. 따라서 파산의 위험성도 높고 파산할 경우 다른 계에 연쇄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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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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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계의 취약성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 이른바 ‘부녀계’ 소동이다. 부녀계 소동은 1954년 말부터 1955년에 걸쳐 전국에서 벌어진 연쇄적인 계 파탄이었다. 부녀계가 고리 사채로 전용되기보다는 상업 자금, 소규모 생산 자금이나 소비 자금 등 자금 조달을 위한 수단이거나 저축의 수단이었음에도 ‘곗바람’, ‘가정부인의 탈선’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이때의 계 소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 계 파탄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1954년 여름 광주 지역에서였다. 광주에서는 제3대 민의원 선거를 치른 1954년 5월부터 몇 개의 계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8월 584건, 9월 1,244건, 10월 878건 등 많은 계가 파산하였다.130)국회 계 사건 특별 조사 위원회, 「지방 계 실정 보고서」 2, 『경향신문』 1955년 4월 3일자.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계 파탄은 주로 광주 지역에서만 발생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유류 파동을 전환점으로 계 파탄은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한에서 소비되는 유류를 대부분 지원해 주던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자 전국적으로 유류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서울은 전체 시내버스의 70%가, 경북은 모든 버스가 운행을 중지해야 하였다.131)『한국일보』 1954년 11월 4일자. 유류 품귀 소동은 석탄, 장작 같은 월동 연료 품귀와 맞물리면서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켰다. 여기에 1954년 5월 치러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일부 출마자가 계를 통해 정치 자금을 끌어 모아 선거에 소 비한 뒤 이를 충당하지 못하는 일까지 생겨났다.132)『경향신문』 1955년 2월 4일자. 확인되지 않은 이 소문은 그 뒤 계를 파탄시켜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주로 야당(민국당)과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으로 변해 유포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곗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고 각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계가 깨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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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계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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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계가 깨지자 깨진 계와 연계된 다른 계에도 영향이 파급되었다. 먼저 광주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계가 깨지면서 채무자(먼저 곗돈을 탄 사람 또는 계주)와 채권자(그때까지 곗돈을 타지 못한 사람)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채무자를 사기죄로 고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어 1955년 1월 서울에서 ‘선데 다방 마담 사건’이라는 계 파탄 사고로 계주 황○○가 구속되면서 계 파탄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같은 해 6월에는 돈암동에서 무려 3억 7000만 환의 현금이 오간 ‘장 마담·오 마담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울 지역의 계 파탄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대구의 ‘나○○ 장로 사건’(금액 약 8,000만 환), 부산의 ‘환우장 정 마담 사건’(금액 약 500만 환) 등 계 파탄이 전국적으로 잇따랐다.

계 파탄은 폭행, 고소, 자살 등의 소동을 불러왔고 경찰이 개입하면서 사건은 확대되었다. 광주 지역에서 계 파탄으로 인한 소동이 이어지자 1954년 10월 25일 전남 경찰국장은 모든 계를 한 달 안에 해산하고 현재 운영 중인 계는 모두 경찰에 등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어 11월 23일 치안국은 각 시도 경찰국에 사설(私設) 계를 강력히 단속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경찰이 단속의 근거로 삼은 법률은 무진령 제37조 “정부의 허가 없이 무진 행위를 한 자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형 또는 2만 5000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는 조항이었다.133)『한국일보』 1954년 11월 25일자 및 1954년 12월 6일자.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전국에서 계를 단속하였다. 표 ‘계 사건 취급 현황’은 경찰이 1954년 말부터 1955년 2월까지 조사한 계의 현황이 다. 경찰 조사를 받은 계만 곗돈 총액 6억 8000만 환 정도인데, 이는 약 6만 가마니의 쌀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134)1954년 12월 30일 서울 시내에서 쌀 한 가마니의 도매가격이 1만 1200환이었다. 『한국일보』 1954년 12월 31일자를 참조하였다.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은 사람은 4,574명, 검찰에 송청(送廳)까지 된 사람은 212명이었다. 또한 계 파탄으로 자살한 사람이 5명이나 있었다. 경찰 조사를 받은 계는 전남 3,817건과 전북 1,133건으로 호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곗돈 액수는 경북 지역이 3억 7000여 만 환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전남 지역이 1억 6000여 만 환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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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마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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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이 계가 깨져 소동이 일어나거나 고소된 사건만 주로 취급한 것을 고려하면 표 ‘계 사건 취급 현황’을 통해 당시 계 파탄으로 인한 소동이 호남과 경북 지역, 그 가운데서도 광주와 대구에서 극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 파탄으로 소동이 가장 심했던 곳은 전남 광주였다. 광주는 6·25 전쟁 때 상무대가 설치되면서 수만 명의 군인이 일시에 주둔하게 되고 전남 방적이 다시 가동되면서 술집과 식당을 비롯한 서비스업이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 장삿길에 나선 여성을 비롯해 약 5,000여 명의 여성이 한 명당 몇 개 또는 수십 개의 계에 가입하였고, 곗돈을 융통하여 새로 장삿길에 나서는 여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침체가 도래하자 많은 여성이 높은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깨지는 계가 속출하였다. 여기에 경찰이 개입해 계의 조직과 곗돈의 지급을 정지시키면서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계까지 도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어 버린 여성과 계가 깨져 그동안 부은 곗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된 계원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도망 다니고, 가재도구를 부수는 대소동이 광주 전역에서 벌어졌다.

<표> 계 사건 취급 현황

단위 : 건, 명, 환
도명 총건수 검거 건수 검거 인원 금액 자살자
서울 350 19 17 7,374,300  
경기 48 14 208 2,532,000  
강원 11 11 115 21,500,000  
충남 168 90 1,169 9,380,700  
충북 8 8 96 2,250,000 1
전남 3,817 825 1,131 163,274,720 1
전북 1,133 58 77 26,926,075 2
경남 212 140 767 59,734,100 1
경북 71 67 268 372,128,000  
제주 47 47 668 18,458,000  
서남 지구 214 56 58 1,260,000  
6,079 1,335 4,574 684,817,895 5
✽총건수는 문제가 된 계의 수, 검거 건수는 경찰이 소환 또는 체포하여 조사한 계의 수, 검거 인원은 경찰에서 조사받은 사람의 수.
✽서남 지구는 빨치산과 경찰·군 사이의 전투가 진행되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한 전남의 순천시·승주군·광양군·곡성군·구례군, 전북의 남원군·장수군·임실군·순창군, 경남의 함양군·거창군·산청군·하동군 일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1955년 6월까지 서남 지구 전투 경찰대 사령부가 치안 및 행정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는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
✽김용호, 「성행하였던 계의 현재 실태」, 『여성계』 1955년 9월호, 85쪽.

결국 국회 조사단이 광주에 파견되었고 1955년 2월 10일 광주 극장에서 계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사단의 일원인 김선태 의원(전남 완도 출신)은 계가 성행한 이유는 경제 정책의 실패와 부당한 은행 대출로, 일반인은 고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검찰과 경찰이 곗돈 사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별 탈 없이 운영되는 계 조직까지 강압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전체적인 계 파탄을 불러왔다며, 경찰이 계 소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곗돈을 떼먹은 채무자들에게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만들어 줄 뿐이라는 채권자들의 원성에 묻혀 버렸고, 공청회장은 “저 놈 죽이라.”고 외치며 연 단으로 달려드는 채권자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135)『경향신문』 1955년 2월 12일자 ; 『한국일보』 1955년 2월 11일자.

사실 은행을 비롯한 금융 기관이 제구실을 못하고 경찰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계마저 강압적으로 중단시켜 파산시켰음을 생각한다면 김선태 의원의 발언은 어느 정도 타당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계를 해산하라고 지시한 뒤 일부 계주가 이를 빌미로 경찰에게 책임을 미루고 고의로 계를 깨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광주 출신 정성태 의원이 1,000만 환이 넘는 빚을 갚지 않으려고 국회 조사단을 구성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채권자들은 김선태 의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소문 때문에 공청회가 열리기에 앞서 정성태 의원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최근에 들은 바에 의하면 광주 시민 중 일부에서는 허무한 낭설을 조작하여 금번 국회 조사단이 내광(來光)하는 것은 계에 관계되는 모든 대차 관계를 백지화하여 채권의 무효 관계를 초래시키기 위하여 내광한다는 풍설을 의식적으로 유포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어데까지나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난마와 같이 얼크러진 계 문제를 수습하여 채권자나 채무자에게 무리한 부담이나 손실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금반(今般) 국회 조사단 내광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채무자는 대부분이 민국당 계열이고 따라서 당국에 문초를 받고 있는 대부분이 민국당 계열이라고 조작이 되어 있으나 모함 중상도 이쯤되면 한낮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136)정성태, 「부인계 문제에 관하여 광주 시민에게 드리는 성명서」, 『전남일보』 1955년 2월 8일자.

이처럼 광주의 계 소동은 채권자와 채무자(한 계의 채무자가 다른 계의 채권자이기도 하였다), 계주와 계원, 정치권과 경찰까지 어우러져 야단법석을 이루었다. 결국 국회 조사단은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가고 계 파탄에 대한 해결은 경찰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경찰의 해 결 방안은 ‘모든 계를 해체하라.’, ‘고의로 곗돈을 갚지 않을 때에는 구속하겠다.’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경찰의 대책은 계 소동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더욱 확대시켰다. 이에 여덟 명의 여성이 서울로 올라가 치안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주장은 “경찰에서 계에 대하여 간섭치 말 것이며 그 다음은 돈을 쓰고도 행방을 감춘 배반자를 꼭 경찰에서 체포해다가 자기들에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137)『조선일보』 1955년 4월 17일자. 경찰의 과잉 대응이 계 소동을 확산시키고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었다.

광주의 계 소동은 1955년 말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되었는데 그 사이 경찰에 신고된 계만 500여 건에 이르러 사기 혐의로 일곱 명의 여성이 구속되었다.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계 파탄으로 인한 소동은 1955년 내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반도주, 폭력, 가정 파탄, 자살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대구시 대신동 김정자 씨는 경제적인 기반이 전혀 없는 몸으로서 700만 환에 달하는 산통계를 모아 가지고 지난 5월 25일경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그리하여 피해자 30여 명은 사기 죄목으로 고소를 하였는데 김 씨의 남편인 배 씨는 이 사건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138)김용호, 「성행하였던 계의 현재 실태」, 『여성계』 1955년 9월호, 87쪽.

대구시 종로 전 국회의원 모 씨의 부인 이복강 씨와 그의 오빠 이복득 씨는 산통계 부채 수백만 환을 갚지 못해 채권자로부터 주야로 독촉당한 끝에 돈을 꾸러 간다는 한마디를 남겨 놓고 지난 12일 넥타이로 두 사람은 허리를 매고 부산항에 투신자살하였다.139)김용호, 앞의 글, 86쪽.

최덕이 씨의 처 김일기 씨는 지난 3일 하오 3시경 자기 집 앞에 있는 다리 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전기 김 씨가 자살한 원인은 남편 최 씨로부터 6만 환을 얻어 계를 모은 것이 깨어져 남편에게는 전기 6만 환을 남에게 돌려주었다고 속여 오다가 지난달 31일 밤 10시경 부부 싸움 끝에 집을 나가 자살한 것…….140)『조선일보』 1955년 11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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