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3. 6·25 전쟁과 계
  • 계 소동의 뒷장
이임하

계 소동이 일어나자 여론은 그 원인을 규명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어떤 경제학자는 곗돈의 정치 자금화, 은행 융자의 금지, 학교에 유입된 입학금과 각종 기부금 등으로 유통 부문에서 화폐가 줄어들어 계 소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141)김삼수, 「계의 사회 경제사적 고찰」, 『재정』 제5권 6호, 1956, 70∼71쪽. 국회 계 사건 특별 조사 위원회 역시 경제 정책과 금융 정책의 실패, 물가 앙등, 통화 증발, 투기 자본 유입에다가 계 자체가 지나치게 고리화된 데에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비현실적인 인플레이션 수습책의 수정, 금리 인상과 은행 대출 확대, 담보 대출 축소, 무진 확대, 저축성 예금 제도의 도입 등을 통해 계를 제도권 금융 기관으로 흡수할 것을 주장하였다.142)국회 계 사건 특별 조사 위원회, 「지방 계 실정 보고서」 1∼3, 『경향신문』, 1955년 4월 2일자·4월 3일자·4월 5일자.

그러나 여론은 여기에 덧붙여 ‘경제 원리의 알파도 오메가도 모르는 부녀자’들의143)정원섭, 「계에 대한 법관으로서의 비판」, 『전망』 창간호, 1955, 79쪽. 허영이 계 소동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성의 허영심과 경제적 무지를 탓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던 부녀들이 계로 인하여…… 우선 화려한 의상과 고귀한 패물 등 금전에 대한 자주성을 맛보는 일종의 쾌감과 또한…… 계에 가입치 않은 사람은 현대 여성이 아닌 양 경멸당하는 현상으로써…… 계에 가입한 각자가 곗돈을 완전 이식이나 사업에 투자 활용하여 실패 없이 잘 운용되었으면 금일의 참담한 비극은 있을 리 만무하였거니와 실례를 보면 일 계의 구성 인원의 단위를 10인으로 가정하면…… 7, 8인은 자금 운용을 잘못하여 곗돈으로 하등 수익이 없는 고정 부동산이나 혹은 사치품, 귀금속 등, 혹은 식리의 목적으로 타인에 대여한 것이 불여의(不如意)하여 이자는 고사하고라도 원금마저 대도(貸倒)되는 등, 혹은 무정견(無定見)한 생활비에 직접 소비 등 결과적으로…… 실패의 제일보를 밟게 되었던 것이다.144)구제현, 「계 폭동과 그 해결책」, 『협동』 47, 1955, 96∼97쪽.

나아가 “땐스가 현대 여성의 ‘에지케트’라고 떠들어대는 바람둥이 주부들의 자기변명에 못지않게, 여성들도 경제 활동을 배워야한다고 계에만 쫓아다니는 부인들의 꼴이란 현 사회 풍조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계를 하는 여성은 “백해무익한 존재이며 가정을 좀먹고 사회를 어지럽히며 정력의 크나큰 소모와 아울러 경제계에 크나큰 화근을 초래”하는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그리고 여성은 가정 밖으로 나와 계를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들의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 어린이 교육과 가정의 건전을 위하여 참다운 가정주부로 새로운 스타트를 하라.”고 충고하였다.145)김용호, 앞의 글, 87쪽. 또한 계와 관련된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비정상’적인 성질을 갖는 계가 곧 사라질 것이며 자신이 판결한 사건이 권선징악의 모태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계 소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피고인은 교회의 전도 부인이라는 레텔과 무역회사 삼흥 실업이라는 간판과 이자 2할이라는 감언이설로써 혼란한 경제 사회의 뒷골목에서 주로 무교양측의 부녀자와 사회와는 등을 쌓고 있는 소시민의 포켙과 등을 쳐가지고 분에 넘게 사치한 생활을 향유했던 것이다. …… (이) 사건이야말로 경제 사회의 아니 가정의 부녀에게 계에 대한 경종이 되었다면 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의 정화를 얻는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피고인은 언도 공판에 임하자 처음에 지녔던 냉랭한 표정이 사라지고 회개와 참회의 정이 넘쳐흐르는 것을 발견했었을 때에는 다행한 일이라 여긴다.146)정원섭, 앞의 글, 82쪽.

사실 1954년 말부터 1955년 사이 전국에서 벌어진 계 소동의 주역은 여성이었다. 서로 얼크러져 치고받고 싸운 사람도, 자살한 사람도,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하거나 경찰서에 나와 조사받은 사람도, 심지어 계 공청회장에서 국회의원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육탄전을 벌인 사람도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단지 계를 조직하고 이끈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온 사회가 들썩거릴 정도로 계가 깨지고 소동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여성이 비대한 계를 궤멸시킬 정도로 사치와 허영에 들떠 있었을까? 적어도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성이 집 밖으로, 거리로 나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부녀계 소동이 벌어질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치와 허영을 부릴 수 있는 여성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때는 하루 세 끼나 연명하고 자식들 학자금 대기에도 벅찬 시기였다. 그런데도 부녀계 소동이 여성의 허영이나 사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훈계는 늘어 가는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활동에 대한 경계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이 사회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한 것은 6·25 전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6·25 전쟁 이전에도 여성은 사회 활동, 경제 활동을 하였지만 그 활동이 사회 구조를 바꾸거나 가정 경제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25 전쟁은 여성의 활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죽었거나 군이나 노무자로 전쟁에 참가한 가장을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여성의 몫으로 맡겨졌고, 1950년대 초반 여성의 경제 활동률이 크게 높아졌다. 직업을 가진 사람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35.6%에서 1951년과 1952년 각각 47.6%와 44.6%로 높아졌다. 6·25 전쟁 뒤에도 직업을 가진 사람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꾸준히 45%가 넘는 것으로 나타나 여성의 경제 활동이 여전히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체 여성 가운데 직업을 가진 여성 비율을 보면 일제 강점기 말에 34.6%에서 광복 뒤인 1949년에 28.4%로 낮아졌다가 1951년과 1952년에는 63.7%와 58.4%로 나타나 14세 이하의 여성을 뺀다면 여성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지 사회적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147)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 『1952년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3, 29∼30쪽 여성의 경제 활동은 “적극적인 면에서 오늘 부(富)의 창조자이고 생산적 담당자”148)백경훈, 「경제적 관념의 빈곤성」, 『여원』 1960년 6월호, 91쪽.라는 표현처럼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두루 이루 어졌다.

상설 시장에서 행상에 이르기까지 “날품팔이, 미군 부대 세탁부, 바구니 장수, 목판 장수, 담배 장수, 군복 장수, 빈대떡집, 대폿집, 다방, 댄서, 요릿집, 계 오야” 등으로149)마해송, 「한국 여성의 비극」, 『여원』 1956년 7월호, 154쪽. 여성들 판이라 할 정도로 거리는 온통 여성으로 넘쳐 났다. 이렇게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 밖으로 나온 까닭은 다양하겠지만 대부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였다.

한두 개의 부녀계가 깨지기 시작하였을 때 그 가운데에는 여성의 사치와 허영 때문에, 곗돈을 떼어먹는 사기꾼 때문에, 또는 경제적 무지로 곗돈을 잘못 운영하여 깨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에게는 계를 이용해 돈을 빌리거나 목돈을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계도 했죠. 계 안 하고는 돈이 안 모아지잖아요. …… 목돈 타고 그러니까, 그래서 많이 꾸려 나갔죠. 그렇죠. 아무래도 애들이 돈 들어가고 그러니께는 그래도 줄라면은, 글 안하면 다른 데로 빌리러 가야 되는데, 빌려도 인자 그 놈(곗돈) 주것다 하고 안심이 되고. 그렇게 하고 꾸려 나갔죠.150)구술 임남주·면담 이임하, 2006년 1월 23일(한성 대학교 전쟁과 평화 연구소 소장).

사회는 살아남기 위해 장삿길에 나서고 자식을 가르치려는 여성의 경제적 욕구를 채워 줄 수 없었다. 연쇄적인 계 파탄은 6·25 전쟁 뒤 급격히 변화된 사회 질서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여성의 현실과 불안정한 경제 구조가 결합되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었다. 또한 계의 성행과 연쇄적인 파탄은 경제적 위기, 가정의 붕괴 같은 사회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지만 여성에게는 경제적 자립과 사회와 교류하는 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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