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4. 부녀계와 여성 유대
  • 한 달 만의 외출
이임하

여성들은 부녀계를 통해 이전과 다른 경제적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여성들이 계를 통해 얻은 경험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계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부계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벗어나 이웃, 동창, 동업자, 학교 등으로 관계망을 넓힐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다시 집을 사들이고 살림살이를 하는 데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나아가 자기 사업을 하는 토대가 되었다.

부녀계의 계원은 보통 친지나 이웃의 소개로 모였고, 계주가 중심이 되어 친분을 바탕으로 계를 운영하였다. 구성원의 관계에 따라 계를 분류하면 1963년 조사 결과 이웃 36.2%, 친구 18.6%, 동업자(주로 상인) 12.5%, 직장 동료 13.4%, 친척 6.9%였다. 특히 서울의 중간층 가정주부는 이웃이나 동창 혹은 친척끼리 조직한 계가 75%를 넘었다.

사실 6·25 전쟁 뒤 조직된 부녀계는 대부분 계주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계원 사이의 관계보다는 계주와 계원의 관계가 좀 더 돈독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계원이 서로 모르기도 하였다. 그래도 대부분의 계는 이웃이나 동창, 친지로 이루어져 가정 환경, 경제적 형편 등 여러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친밀감은 농촌에서는 더 분명하였다.

계원들끼리 허믄 (돈이 필요한 사람을) 뻔히 다 (알아)…… 이제 그 참 돈을 아졍왕이네(가지고 와서는) 뵈왕이네(보여 주고는) 다시 또 다시 빚져 가는거라.162)구술 강지하·채록 이선화·한림화, 『구술로 만나는 제주 여성의 삶 그리고 역사』, 제주도 여성 특별 위원회, 2004, 54쪽.

3만 원씩 열이 내면 몽땅 걷어서 필요한 사람 주고 그랬지. …… 시골서 나락계, 보리계도 있었거든. 그것도 그런 식으로 걷어, 똑같이. 곡식으로 다섯 말이면 다섯 말, 한 가마니 해 가지고 먼저 태워 주고…… 그 사람이 형편이 곤란해서 필요하다면 돌려주고.163)구술 김정묘·면담 이임하, 2006년 3월 2일.

도시에서는 계원 사이의 친밀감이 농촌보다 낮았다. 그래도 이웃이나 동창끼리 조직된 계가 많았기 때문에 1967년 표본 조사에서 “어려운 일이나 일손이 부족할 때 계원들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몇몇 친한 사람에게만 청하겠다.” 57%, “전원에게 청하겠다.” 11%, “본인은 청하지 않겠으나 타인이 희망하면 도와주겠다.” 9%로, 70% 이상이 돕거나 도움을 받겠다는 태도를 취하였다.164)박민자, 「도시 부녀자계의 사회학적 연구」, 이화 여자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67, 94쪽.

계의 운영에서 중요한 일의 하나는 곗날이었다. 부녀계 역시 다른 계와 마찬가지로 곗날이면 계원이 한 장소에 모여 음식을 먹으며 계의 운영에 대해 논의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 계 모임 장소로 농촌에서는 계주나 계원의 집을 이용하였고, 도시에서는 “부녀자들은 계 때문에 외출·회합하는 장소를 한식당으로 지정하여 식사도 하고 계도 하기 위하여 집합하는 바람에 한식집은 성업을 이루(었다)”는165)이각우, 「낙찰계의 법률상 문제」 2, 『경찰 고시』 1972년 12월호, 경찰 고시사, 48쪽. 지적처럼 대부분 음식점을 이용하였다.

여성이 집 밖에서 모이는 계 모임은 “부녀들로 하여금 거리로 다방으로 온종일 외출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거기에는 허영과 사치의 풍조가 물들어 가정주부로서 책임을 완수치 못하는 부녀층이 있는가 하면 계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사례가 있어 심각한 사회 현상을”166)권혁정, 앞의 글, 83쪽. 불러오는 계기로 말해지곤 하였다. 그러나 실제 계 모임에 참석한 여성의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계 모임은 가정의 문제를 토로하는 자리이자 사회생활의 통로였다. 특히 집 안에서 살림을 하는 주부는 계 모임을 일상의 피로를 해소하고 가정 밖 세상과 교류하는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친구 몇몇이 직장과 가정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데까지 연락해서 한자리에 모아 놓고는 이제부터 “동창계를 해야겠다.”고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 우리가 계를 동창생들의 유대를 깊게 하기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더 부드럽고 신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달마다 모이는 곳은 모 중국집에서 모이고 있습니다. 아마 두 달 전쯤이라고 기억됩니다. 하루는 모임을 끝내고 여럿이 문밖을 나서는데 지나가는 신사들의 얘기가 “야 계꾼들이시군!”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계 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집을 비우고 다니는 것이 싫어서인지 모르겠읍니다만 우리들은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꼬박 한 달을 기다렸다가 한자리에 모이면 아들 자랑 남편 자랑 또 데이트하는 얘기며 하여튼 얘기의 꽃은 끝이 없습니다.167)이성실, 「동창끼리의 즐거운 친목계」, 『여상』 1964년 11월호, 210쪽.

무턱대고 모이자면 잘 모여지지가 않아 계 모임이라는 이름을 두고 대학 동창 14명은 한 달에 한 번씩 특별 외출할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10년 가까이 계속 모이게 되는 것은 서로가 이 모임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어떤 친구는 이날을 기다리며 산다고 농담 섞인 말을 했지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가정에 파묻혀 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정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대화를 잃고 웃음을 잃고 재미를 모르고 사는 주부이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동창계 모임을 기다리며, 이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긴다. …… 그들의 불만과 비명은 한국 주부들의 것이기도 하고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을 키워 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모임이라면 그저 놀기 위해서 가진 계 모임이라 볼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를 넓혀 가는, 주부들의 성장을 도와주는 모임이라 봐 주는 게 좋겠다. 또한 고달프고 정서적인 취미 생활을 빼앗긴 살림에서 한 달에 한 번 모일 계 모임을 야외에서 가져 자연과 함께 마음을 위로받는다면 우선 주부들의 정신적인 건강도 좋아질 것이다.168)김행선, 「곗날은 한 달 만의 외출」, 『여상』 1964년 11월호, 211쪽

계 모임에서 나누는 대화는 가족의 안부를 묻는 것을 비롯해 남편과 관련된 얘기, 살림살이, 자녀 교육 및 양육 문제 따위를 중구난방식으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대화는 때에 따라 정치, 경제, 유행 같은 시사성을 띠기도 하였다. 계 모임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여성은 자신과 단절되었던 가정 밖 세상을 알게 되고 살림살이의 지혜를 배웠다. 또한 모든 대화가 그렇듯이 자기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곧 ‘한 달 만의 외출’을 통해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여성은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을 키우고 인간관계를 넓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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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곗날은 살림살이에 쫓기던 여성들이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는 날이기도 하였다. 여성은 계 모임에 나가기 위해 오랜만에 치장을 하거나 계원끼리 어울려 놀이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 달 한 달 모이면 해원(늘) 놀고…… 그자 여저덜끼리만 모야졍(모여 들어서)…… 노래덜 불르멍 이제 장구 치멍 춤도 추구…… 어느 술을 먹으카, 무시거 허카, 막상 먹을 거나 행 강이네 수제비 겉은 거나 그런거나 해 먹고.169)구술 강지하 ·채록 이선화·한림화, 앞의 책, 55쪽.

계 모임은 때때로 일탈로 이어져 사회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였지만 생활의 활력이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 친목과 일상의 탈출이라는 성격에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교양을 쌓는 모임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 계는 전문대학을 졸업한 중년 부인들로써 직업여성과 가정부인이 섞여 구성되었다. 내가 참석하기 전에 모임에는 기독교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강사를 모셔다 들었다고 하였다. 다음 기회에는 천문학 교수를 모셔다 우주 과학에 관한 것을 듣겠다는 것이다. …… 식사를 하는 동안…… 신문, 잡지 및 서적을 통하여 읽어 온 또는 간접적으로 들었던 상식적 학문적 이야기를 교환하였다. …… 일반적 경향에서 이탈된 새로운 계의 출현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아직도 성인 교육 기관이 발달되지 못한 현 단계에서 계와 같은 모임을 통한 노력이 필요하다.170)이효재, 「계의 변화」, 『조선일보』 1966년 7월 7일자.

이처럼 대부분의 계가 친목, 일상의 탈출, 사회생활의 통로였고, 나아가 “고아원을 돕는다든지 탁아소를 돕는다든지 하는”171)이성실, 앞의 글, 211쪽. 사회 복지 활동이나 학술 행사를 기획하여 열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성격이 소모임 활동이나 여성 단체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문제를 소통할 공간이 없던 시절에 부녀계는 여성에게 일상을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이 네트워크가 오늘날까지 계의 생명력을 이어 가도록 하는 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녀계는 공식적으로 여성을 사회로 불러 내고 세력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는 여성을 묶어 낼 사회적 조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생산된 부녀계 담론, 곧 계 무용론(소멸론)으로부터 시작해 계를 전근대적 모임으로 몰아붙이거나 ‘허영과 사치의 진원지’라는 담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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