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1. 학교에 간 여성
  •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김정화

아들은 가르치되 딸은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어려서는 부모를,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늙어서는 자식을 좇으라는 ‘삼종(三從)’의 틀 속에서 여성은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에서 어머니를 통해 부덕(婦德)을 몸으로 익혔다. 여성은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더라도 공식화된 교육 기관을 다닐 수는 없었다. 『내훈(內訓)』에서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부덕(婦德),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부언(婦言), 몸맵시를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부용(婦容), 바느질을 열심히 하고 손님을 정성껏 대해야 한다는 부공(婦功)을 모범적인 여성상으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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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 개항으로 조선은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변화를 요구받았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더불어 부강한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실력을 키워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의 위협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선인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여성을 교육시키지 않는 사회는 ‘반신불수(半身不遂)’와 같다며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개화 사상가들은 교육이 낡은 편견을 물리치고 새로운 인재를 만들어 낼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을 통한 ‘구국(救國)’이라는 거대한 논의 속에서도 교육의 목적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었다. 개화파 지식인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까닭은 여성이 남편의 내조자이자 자녀의 양육자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을 교육하여 놓게 되면…… 남자가 혼인 후에 집안일 서로 의론하여 가도(家道)를 흥왕(興旺)케 하되 능히 그 남편을 도와 편지도 대서(代書)하며 문서도 기록하며 한가할 때 서책을 보며 학문을 토론하니 집안에 화기가 충만하여 백년을 해로(偕老)하는…… 어린아이들이 10세 이전에 언행과 동정을 배우나니 그 어머니가 학문이 있으면 학교에 보내기 전에는 그 모친이 가르치리니 이것은 양육하는 모친만 될 뿐 아니라 여자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185)『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자.

독립된 인격 형성과 자아 개발이라는 교육 본래의 목적보다는 남편의 보조자이자 자녀의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역할을 집안일로 제한하였다. 여성이 가정에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사상이 반영되었다.

여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여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Scranton, M.) 부인이 1886년(고종 23)에 세운 이화 학당을 시작으로 정신 여학교, 진명 여학교 등 외국 선교사와 민간이 세운 여학교가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새로 생긴 이들 여학교의 설립 목적도 개화 사상가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06년(광무 10)에 개교한 명신(숙명) 여학교의 설립 목적을 보면 분명하다.

본교의 목적은 여자의 학자를 작(作)함에 부재(不在)하고 다만 온량(溫良) 정숙(貞淑)하여 장래 가정 양처현모(良妻賢母)를 양성코자 하는 외에 타의(他意)가 무(無)한지라 종(從)하여 학도 덕성(德性) 함양에 신중하여 학교 전체의 화기(和氣)가 애연(靄然)한 일 가정이 되어 장유(長幼)의 서(序)를 겸하며…… 근면의 성(性)을 양성하여 가정에 재하여는 유순한 여자가 되며 학교에 재하여는 충실한 생도가 되고 우(又) 학교를 출하여는 정숙한 부인이 되게 함을 면려(勉勵)함에 재하니…….186)『매일신보』 1911년 4월 9일자.

1908년(융희 2)에 이르러서 국가가 최초로 한성 고등 여학교를 세웠다. 국가가 여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여성 교육을 공교육으로 제도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순종 비(妃)가 한성 고등 여학교에 내린 휘지이다.

보통 교육은 남녀의 별(別)이 무(無)한 것이니, 여자는 가(嫁)하여 부(夫)를 익(翼)하고 가(家)를 이(理)하며, 자녀를 부육(扶育)하는 책임을 부(負)하여 일가(一家)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추(推)하여 국운(國運)을 비보(裨補)함도 큰 것이니, 국가가 어찌 여자 교육을 중요히 여기지 아니하리오.187)『구한국관보』, 1908년 5월 26일 : 이임하,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 서해문집, 2004, 17쪽 재인용.

1905년(광무 9)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로는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계몽된 여성의 양성이 더욱 강조되기는 하였지만 대한제국의 여성 교육 목적도 남편의 보조자요 자녀 양육자의 역할이라는 면에서 개화 세력이나 선교사 등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따라 학교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초창기 여학교 는 학생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88년 이화 학당에 입학한 한 여성은 학교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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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에 의한 여성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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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뭐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계집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치는 양국관(洋國館)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나도 거기에 보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말했더니 대뜸 “거기 가면 양녀(洋女)들이 눈을 뺀다.”는 것이었다. …… 이때 학생들은 학교에서 꼭두서니 다홍으로 일제히 같은 옷들을 해 입혔으며 공부는 별것 없고 처음에는 소꿉질을 하게 하더니 주기도문 또는 찬송가를 영어로 가르쳐 주고…… 그런데 학생들이 집엘 다니러 나갔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서 통 내보내지를 않아서 10년, 12년씩 그 안에서 못 나가보는 사람이 많았다.188)김롯세, 「한 세기 전 얘기」, 『이화 70년사』, 이화 70년사 편찬 위원회, 1956, 322∼323쪽.

학교는 학생들에게 의복, 침식, 학비 등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였지만 학생을 모으기는 어려웠다. 선생들이 직접 등사판에 “여자도 배워야 한다.”,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라는 광고지를 붙여, 구풍습을 일소하고 국가의 힘을 기르려면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학생을 모집해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가정은 드물었다. 그나마 양반 자녀는 가마를 타고 다니고 중류 이하면 쓰개치마를 입고 학교에 왔다. 학생은 대부 분 가난하여 집에는 먹을 것이 없는 소녀나 고아들이었다.189)「십 년 전 학생과 금년 여학생」, 『신여성』 제3권 제1호, 1925, 14쪽.

전통적으로 활동 영역이 가정에 국한되어 자유로운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이 가정 이외의 공간에서, 그것도 근대적 공부를 하는 일은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내외법(內外法)이 폐지되자 여성이 비교적 자유롭게 바깥출입을 하게 되고 쓰개치마를 벗어 버리고 활동에 적합한 의복이 등장하는 등 여성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학생도 점차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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