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2. 규율과 훈육 그리고 정체성 찾기
  • 여성, 사회에 저항하다
김정화

여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읽고 쓰는 능력을 습득하였고,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 안에서는 독서 모임 등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어 나갔다. 친구, 선후배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자기와 세상을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함께 이야기하고 책이나 잡지 등 출판물을 읽음으로써 자신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다.

식민지 조선의 “남이 다 밧지 못하는 교육을 밧는” 조선의 여학생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욕망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교육받은 여성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바로 보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대문 밧 제사 공장이나 전매국 가튼데 참관을 가서 얼마나 만은 당신의 자매들이 일편(一片)의 빵을 구하야 모진 착취의 체즉 압헤 창백한 얼골을 경련(痙攣)하고 잇는가를 보라. 그들의 생활을 눈 압헤 보고 그들과 이야기할 때 비로서 그들의 아름다운 공상(空想)의 나라와는 엄청나게 다른 한 나라가 잇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219)박노아, 앞의 글, 72∼74쪽.

적어도 새 여자로서 압 세상에 살사람은 현모량처(賢母良妻)가 된다는 것보다 사회 개됴의 진두에 나설 싸움군(鬪士)이 되어야 함니다.220)박노아, 앞의 글, 72∼74쪽 : 이돈화(李敦化), 「여학교 졸업생들에게 긴절한 부탁 한 마듸」, 『신여성』 제4호, 192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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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의 노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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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허정숙(許貞淑)이 사회 조직을 개혁하는 운동만이 여성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다소간 먼저 배웠다는 우리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짐”221)허정숙, 「부인 기자의 첫걸음 : 문(門) 밧게서 26분(二十六分)」, 『신여성』 제3권 4월호, 1925, 50∼53쪽.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듯이 상당수의 여학생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가 야학을 만들어 가정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여학교 졸업생 좌담회에서도 “실제적으로 곤란당하는 농촌 부녀나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그들을 위하야 우리가 몬저 선도자가 되여야 할 것이며 우리가 들들의 유일한 동무가 되여 인도하여야 할 것이 우리가 가장 늣기는 일생의 조흔 직무”222)「여학교 졸업생 이동 좌담회」, 『신여성』 제6월호, 1931, 68쪽.라고 기층 민중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였다.

여학생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행동하였다. 한 카페 여급이 남성에게 속아 어린애를 낳아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진명 여학교 학생 100여 명은 법정에 몰려가 방청을 하였다.223)「자비심 만흔 진명여생(進明女生)─살인 여인에 동정 함루(含淚)─」, 『신여성』 제10월호, 1931, 73쪽. 단순한 개인적 동정심을 넘어 사회의 부조리에 집단적으로 참여해 힘없는 여성과의 연 대 의식을 보여 준 단면이기도 하였다.

경성 여자 상업학교 학생이던 송계월(宋桂月)이 광주 학생 운동에 참여한 과정을 보면 여성 사이의 연대 의식을 볼 수 있다. 서울 지역 각 여학교의 학생은 광주에서 학생들이 일제에 대항해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 독립 운동사 자료집』 가운데 동맹 휴교 사건 재판 기록(同盟休校事件裁判記錄)을 보면 이화, 숙명, 배화, 동덕, 근화, 실천, 정신, 태화 여학교, 여자 미술, 경성 여자 상업, 경성 보육 학교 등 서울 지역 대부분의 여학교 학생들은 ‘근우회’의 허정숙, 박차정(朴次貞) 등과 함께 여학생의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학교생활을 통해 의식을 성장한 송계월은 광주 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보안법 위반 처분을 받았고 출소한 뒤에도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하는 등 사회 운동과 여성 해방 운동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여성이었다. 그녀는 1933년 좌담회에서도 “학교에서들 일본 스끼야끼 만드는 법 무슨 양요리 만드는 법 같은 것을 아리키는 데 조선 사람이 배워야 소용이 있어야지요. 먹을 일이 없다느니보다 그런 것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학교 교육이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였다.224)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 역사, 2004, 312쪽.

학생들은 획일적인 질서와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학교에 대해서도 동맹 휴학을 통해 집단적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기숙사 제도와 관련한 동맹 휴학이 계속되었다. 1927년 숙명 여고보 전교생 400여 명은 ‘나카지마(中島, 사감) 면직, 사이토(齊藤) 교무 주임 사퇴, 학생 대우 개선, 한국인으로 재봉 선생 개임(改任), 한국인 교원 채용 증가, 인격 있는 교원의 대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4개월에 걸쳐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이는 선생에 대한 단순한 반항을 넘어 일제의 일본화 교육에 대한 저항이었다.

숙명은 본래 한국인의 경영이었으나 교원을 채용하는 일, 기타 모든 것 에 대하여 일본인이 전부를 좌우하는 까닭에, 기숙사 사감까지 일본 여자를 두어 한국 가정의 풍속도 잘 모르는 데다가 순일본식으로만 시키려 하고 조선 재봉에도 일본인 교원이 가르치게 됨으로 학생들에게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며. 전 교원 22명 중 한국인은 겨우 5명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인격적 대우도 하지 않는 것 등에 분개하여 그와 같이 휴학을 한 것이라 하는데,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 당국의 책임적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더라.225)『동아일보』 1927년 5월 27일자.

학생의 저항은 1929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을 통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30년을 넘기면서 이 운동에 여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광주 학생 운동 관련 여학생의 신문 조서를 보면, 학생들은 “학교는 경찰의 침입에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 정책을 전폐하라, 광주 학생 사건에 대하여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모두 석방시켜라, 조선 청년 학생이여 일본의 야만 정책에 반대하자, 각 학교는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하였다. 여학생 윤옥분, 이순옥 등은 적기(赤旗)를 만들어 제국주의 타도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 무산자 계급 혁명 만세를 외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광주 학생 운동을 확대시키는 데는 기숙사 학생들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우리가 2학년 때 광주 학생 사건이 일어났다. 기숙사 4층은 어둡고 넓은 방으로 되어 있는데 학생들의 옷 넣는 고리짝들을 너저분히 쌓아 놓아 일종의 광처럼 쓰고 있었다. 이 방에 전교생들이 모여서 비밀회의를 하였다. 전국 학생들이 궐기하는 이 마당에 우리 이화 학생들도 행동을 개시해야 된다고 애국적인 열변을 토하며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다 같이 일제에 항거해야 된다고 하였다.226)김자혜, 「통치마 저고리로 스케이팅을」, 『이화 기숙사 110년 이야기』,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1998, 90쪽.

보안법 위반으로 신문을 받던 숙명 여고보의 한소애(韓蘇愛)는 조서에서 기숙사 쪽은 단결되어 있고 통학 학생들을 운동에 참여시킬 방법을 강구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보안법 위반 피의자 가운데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 상당수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화 여고보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던 최복순(崔福順)의 신문 조서를 보면 운동의 모의 공간이 기숙사였으며, 조직 또한 기숙사 학생이 주축을 이루었다. 시위운동에 쓰였던 태극기 등 깃발도 기숙사에서 만들었다.

최복순(崔福順)은 1월 9일 학교 교실에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김진현(金鎭賢), 최윤숙(崔允淑)과 만나 광주 학생 사건에 대하여 이화(梨花)교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이때 시내 각 학교와 보조를 같이하여 시위운동 실행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이어서 그날 근우회(槿友會) 간부인 상 피의자 허정숙(許貞淑)을 방문하여 결국 시내 각 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시위운동 실행을 한다는 것을 알려 이의 원조를 의뢰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학교의 선동 단결 방법에 대하여는 다음 1월 10일 금요일 방과 후 최복순 단독으로 기숙사에 가서 3학년 A조의 한덕훈(咸德勳), B조의 최현수(崔賢守), 양원숙(楊元淑), 안임순(安壬順), 이옥련(李玉蓮)을 최현수 방에 집합시켜 시위운동 실행을 제의하면서 찬성을 요구하였고, 중앙 본부를 조직하여 4학년생 1명, 3학년생은 각 조에서 각 1명씩 본부원을 선출하기도 하고……227)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동맹 휴교 사건 재판 기록(同盟休校事件裁判記錄)─최복순(崔福順) 신문 조서(제2회)」, 『한국 독립 운동사 자료집』,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3.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사감의 감시와 엄격한 규율에 따른 억압의 공간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저항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기숙사의 생활에서 여학생은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으며, ‘방 언니’와 같은 자매애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기반으로 운동을 조직화시키는 데 앞장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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