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3. 수학여행 전성시대
  • 수학여행
김정화

근대 학교가 생겨나면서 견문을 넓힌다는 교육 목적 아래 학생들의 야외 학습이 이루어졌다. 교통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에는 하루에 다녀올 수 있던 남산·청량리·한강 나루로 놀러 나갔다. 이것을 원족(遠足) 또는 화류(花遊)라고 불렀는데 소풍과 같은 성격이었다. 원족을 나갈 때 여학생은 쓰개치마를 벗기는 하였지만 맨얼굴은 내놓고 다닐 수 없어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기도 하였고, 전차를 대절해서 서대문에서 종로를 지나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까지 가는 집단 소풍은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3박 4일에서 길게는 6박 7일을 일정으로 하는 수학여행은 1899년 경인선 개통을 시작으로 경부선(1905), 경의선(1906), 호남선(1914), 경원선(1914)이 놓이면서 가능해졌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학교는 연례행사처럼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학생은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철도를 이용해 평양으로, 금강산으로, 경주로, 그리고 만주와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기차와 연락선을 타는 장거리 여행 경험은 학생들의 근대적 경험을 확장시 켰다.228)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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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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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이 아무리 학업의 연장이라고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집과 학교를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것은 마음은 설레게 하였다. 아침에 조금만 일찍 나가도, 저녁에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걱정인 여학생을 둔 가정에서는 “큰 계집애가 남선생을 따라서 시골을 가는 것이 다 무엇이냐, 그것도 무슨 공부란 말이냐?”229)임용화(任龍化), 「여학생 특집난(제1회 同德部), 저의들의 바라는 몃 가지 학교와 가정의 중간에서 여학생의 희망」, 『별건곤』 제7호, 1927년, 112∼114쪽. 하는 걱정이 매번 따랐지만 학교의 공식 행사였던 만큼 학생들은 대부분 참여하였다.

조선의 현실을 무시한 수학여행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딸을 밖에서 재워야 한다는 불안감에 앞서 수학여행비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큰 부담이었다. 1935년 고무 공장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30전 내외였음에 비추어 볼 때 5박 6일 동안의 금강산 수학여행비 16원을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이나 만주로 떠날 경우 적어도 40원 이상이 필요하였다. 입학한 학생 중 상당수가 경제적 문제로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되자 경성 고보에서는 1930년 신입생 모집 요강에 입학 원서 제출 시 학부형의 납세 증명서 첨부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사회 문제가 되어 총독부의 철회 권고를 받았지만 그만큼 조선의 가정은 여유가 없었다.

수학여행이 단순한 관광 여행으로 전락해 버리거나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된다는 비판도 높았다.

견학을 가려면 사무실 중에서 그곳 일을 잘 아시는 이가 설명을 하여 주시던지 그럿치 안흐면 토요일 오후 갓흔 때를 리용하야 그 회사 그 사회에서 실제로 일하는 이를 청하야 설명을 자세히 들려 주고 그러고 나서 견학을 가면 아모리 복잡한 일이라도 미리 듯고 와서 보는 것이라 속담에 ‘개 머루 먹듯’ 하지는 안흔 것 갓슴니다. 그러고 앗가 말슴한 거와 가시 학생들의 실제 생활을 좀 더 생각해 주신다면 신문사 견학보다도 제사 회사 방직 회사 고무신 공장 정미소 간장 회사 고아원 갓흔 곳을 먼저 보여 주실 줄 암니다.230)임용화, 앞의 글, 112∼114쪽.

어떤 학생에게는 유적, 유물을 구경하기보다는 식민지 현실을 바로 보고자 하는 욕구가 더 중요하였다. 일회성 연례행사로 끝나고마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수학여행 일반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여학생은 생리적으로 남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학생은 남학생보다도 수학여행을 강요해서는 아니된다”는231)주요한, 「말성만흔 여학교 수학여행 문제」, 『신여성』 제11월호, 1931, 17쪽. 문제 제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런 주장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과정에서 세계관을 확장하게 되는데, 여성이 다른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여학교의 수학여행지는 대부분 개성을 거쳐 평양, 금강산을 가거나 경주를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강화도, 금강산, 평양, 경주 등은 한민족의 ‘위대했던’ 과거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어느 면에서 수학여행은 3·1 운동으로 높아 가던 민족주의적 경향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을 지나면서 조선 총독부는 새로운 수학여행 코스를 마련한다. 수학여행지는 조선을 넘어 만주나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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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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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만주와 도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많은 학교가 1930년대 들어 만주나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서 다시 증기선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떠났다. 식민지 본국의 수도인 도쿄로의 수학여행은 근대화된 제국주의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한 의도가 뚜렷하였다. 일본 천황의 궁 앞 광장과 신사 참배는 거의 필수 코스였다. 일본으로의 수학여행은 4학년에게 “여행 중 일본 궁성 앞에서 근로 봉사라는 것도 하고 신사만 찾아다녀 반드시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학생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국회의사당, 군항, 공장과 같은”232)경기 90년사 편찬 위원회, 『경기 90년사』, 경기 고등학교, 1990, 166∼167쪽. 여러 시설을 견학하면서 식민지 본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발달된 근대적 문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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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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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도 수학여행을 떠났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이어서 만주 지방을 여행하였다. 만주는 일제가 1905년 러시아에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조선에 대해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러일 전쟁 승리의 기념비적인 장소였다. 그뿐 아니라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일본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해 침략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든 곳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학생에게 일본 제국의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몸소 체험하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봉천, 무순, 신경(만주국의 수도), 여순, 대련, 안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만주 여행의 의도는 러일 전쟁의 격전지를 구경시키고, 특히 만주 사변 뒤에는 일본이 괴뢰국으로 세운 만주국을 또한 구경시켜 일제의 위대함을 실감하도록 하는 데 있었으나 그 의도가 본래 무엇이었든 관계없이 학생들은 생후 처음으로 접하는 이국 정취에 큰 흥미를 느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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